“너희들이 커피를 알아” 국내 커피박사 1호 권장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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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커피를 알아” 국내 커피박사 1호 권장하씨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5.07.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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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눈질한 커피로 성공신화 개척
자체 브랜드 개발, 세계시장 공략 채비
   
우연하게도 권장하씨를 만난 것은 책 때문이다. 그가 쓴 ‘커피문화의 발자취’가 요즘 서점에서 심심찮게(?) 카운터에 올려진다. 이 책은 커피에 대한 종합적인 교본으로, 국내에서 이처럼 커피의 역사와 커피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다루기는 처음이다.

권장하씨 스스로 “책을 쓰기 위해 숱한 발품을 팔았지만 국내에선 별 효과를 못봤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에 대해선 아직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다. 이를 깨고자 전신을 커피로 무장한 사람이 바로 권장하씨(53)다.

우선 그는 집안의 내력으로 눈길을 끈다. 한 때 청주를 대표한 인물, 고 권태성씨가 부친이다. 청주상의 회장을 지냈고 청주시정 자문위원장, 지금으로 말하면 시의회의장을 16년간이나 지낸 지역의 명망가였다.

막내동생 권인화씨는 역시 유명 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맏형 권승화씨는 국내 스포츠 특히 골프용품 취급점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연매출 400억원 규모의 마스터즈 통상을 이끌고 있다. 이 밖에 누님 권춘하씨는 청주교대 교수로, 아랫동생 권정하씨는 건설업(태암)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들 형제중에서도 사실 권장하씨는 지금까지 지역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부친 권태성씨의 유지로 설립된 장학재단 간송문화재단은 현재까지 20여억원의 재산으로 매년 대학교수와 불우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청주고(46회)와 충북대 축산학과를 나온 그는 1981년 홀연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토론토 Guelf 대학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유가공 분야를 공부하기 위함인데, 이민을 택한 것은 그래야 학비가 덜 들었기 때문이다.

충북대에 다닐 때부터 이미 형제들의 공동농장인 청주 강서 ‘권농장’의 책임자로 일할 정도로 농업이나 축산분야는 당연히 그의 ‘미러를 향한 최대 관심사였다. 그러나 토론토 대학에 입학하기 전 1년 반동안 어학연수를 하면서 아는 사람의 도너츠 거피숍 매니저로 일한 것이 그의 삶에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이 때부터 아예 대학도 포기하고 커피에 몰입했다.

시쳇말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오로지 커피에 탐닉하던 권장하씨가 다시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9년 10월 서울 압구정동의 소위 로데오거리에 자체 브랜드 미스터커피 최초점을 오픈했을 때다. 가수인 동생 권인하를 전속모델로 내세워 본인이 직접 바리스타(커피 전문조리사)로 일하며 고객을 넓혔다. 이 때의 경험은 2년전 ‘바리스타의 길’이란 책으로 거듭났다. 그러니까 국내에선 유일하게 권장하씨가 커피전문서적 2권을 낸 것이다.

   
커피학을 전공하고 싶어도 관련 학문이 없는 것에 항상 아쉬움을 갖던 그가 주변의 권유로 용기를 얻어 낸 책들이다. 때문에 지인들은 그를 국내 커피박사 1호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권장하씨의 자체 브랜드 미스터커피는 셀프서비스 영업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 성공여부가 불투명했다. 기다란 서비스 카운터에 테이블 의자 또한 높게 올라앉는 형태여서 고객들의 첫 반응는 “저래가지고 장사가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상 ‘원두’로 상징되는 고급커피의 제조와 보급에 매달린 결과 지금은 전국 200여 커피하우스에서 미스터커피를 취급한다.

이중 권장하씨가 직영하는 것은 현재 압구정과 명동점 단 두곳이다. 미스터커피는 이른바 다방커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전통의 커피문화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 왔다. 미스터커피는 처음 이태리에서 최고급으로 치는 명품 ‘토레파지오네 포티올리’를 수입해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부드러운 뒷맛과 혀를 타고 도는 독특한 향이 마치 민트향이 퍼지는 듯 느껴지는 이 제품은 세계 40여개국에서 오직 전문 디스트리뷰터만을 통해 공급되는 것으로, 국내에서도 미스터커피가 일부 명소에서만 독점 공급함으로써 금방 입소문을 탔다. 여전히 일반 백화점이나 수퍼 등에선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고급커피시장은 1999년에서 2002년 사이 급격하게 팽창했다. 각종 브랜드와 점포가 우후준순처럼 생겨났지만 곧바로 경기침체로 된서리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커피의 질적 향상은 많이 이루어졌다는 게 권장하씨의 분석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개발된 커피의 자체브랜드는 소소한 것까지 합쳐 대략 2, 30여개 정도로, 이중 미원의 대상그룹이 상품화에 성공한 로즈버드가 손꼽힌다.

권장하씨에 따르면 고급커피의 수요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소득 2만불이 되면 원두커피 즉 고급커피에 대한 욕구는 지금보다 엄청나게 늘어난다. 10배에서 20배까지도 가능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과정을 귀찮아 하지만 앞으로는 커피 자체가 자연이나 건강식품으로 더 각광받기 때문에 시장전망은 어떤 품목보다도 밝다.

이번 커피교본 발간을 계기로 앞으로는 연구와 교육, 그리고 저술에만 전념하겠다. 현 김포의 공장규모를 넓혀 청주 농장에 최신식 제조시설을 설립하려고 한다. 여건만 된다면 고향인 청주에 전문학교나 학원도 세우고 싶다. 그동안의 노력결과로 원두커피 제조기술에서 만큼은 자신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세계 수출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미 중국이나 동남아등의 각종 행사에 출품이 약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교육청과 손잡고 서울국제 커피아카데미(SICA)를 설립해 원장으로 후진양성에 힘쓰는 그는 현재 대학강의와 방송출연 등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며 우리나라 고급커피문화 전파에 선구자로 나선 상태다.

커피음용은 혁명의식의 ‘발상’
한 때 선각자 및 지식인들과 불가분 관계
권장하씨가 쓴 ‘커피문화의 발자취’에 따르면 커피는 세계혁명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속설에 걸맞게 커피를 음용함으로써 새로운 발상, 바로 혁명의식을 키워갈 수 있었다는 것. 이는 구라파나 남미의 커피농장에서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나 농부들이 종종 폭동을 일으켜 큰 사회적 변화를 유발시킨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처음 이디오피아에서 발견돼 아랍을 거쳐 터기와 유럽 신대륙으로 전파된 커피는 그 사회에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제공해 왔다. 커피하우스로 통칭되는 숍엔 늘 유산가나 지식인들이 드나들었고. 자연히 토론이나 사교의 장이 되고도 남았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할 때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고종황제와 담소하는 자리에 선보인 것이 커피의 최초였다는 우리나라에서도 커피는 지금과는 다르게 상당한 의미로 다가 왔다. 이는 광복과 6·25 전후의 명동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이 때 한국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은 명동과 충무로 일대 다방을 전전하며 향기 그윽한 커피를 벗삼아 인생과 철학을 논했다. 이곳엔 광복의 환희는 물론 전후의 페이소스(Pathos)가 넘쳐 흘렀고 실존주의 철학과 니힐리즘(허무주의)이 격정적으로 토로된 것이다. 이 때 이곳 다방, 예를 들어 돌체, 휘가로, 모나리자, 리버티, 학림 등을 거쳐간 유명인사만 하더라도 당시 한국사회를 이끌고도 남았다. 명동백작 이봉구(소설가)를 비롯해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으로 시작되는 소위 명동샹송의 작사가 박인환, 공초 오상순, 수주 변영로, 시인 조병화와 31세로 요절한 천재 전혜린 등이 모두 이곳 명동 다방에서 ‘은성’이라는 대폿집을 오가며 한시대를 풍미한 기린아들이다.

청주 역시 나름대로 유명한 다방역사를 갖고 있다. 80년대까지 성업한 청주 중앙공원 입구의 ‘가고파’ 다방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충북도청 앞 ‘교차로’ 그리고 시청 후문앞 ‘25시 다방’ 등은 숱한 사람들의 추억을 안고 있다. 이곳에도 한 땐 기관의 정보원, 지역 유지와 명망가들이 들락거리게 되면서 청주의 ‘여론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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