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허원교수의 실크로드 탐방기(1) 기회와 모험의 비단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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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허원교수의 실크로드 탐방기(1) 기회와 모험의 비단길을 가다
  • 충청리뷰
  • 승인 2002.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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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대 역사문화관(관장 허원 교수)에서는 지난 6월 28일∼7월 8일까지 10박11일 동안 동서문명의 교차로인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본지는 이에 따라 허교수의 실크로드 탐방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떠나던 서원대 역사문화관 해외문화탐방이 올해로 벌써 4회째를 맞았다. 이번 여름의 행로는 실크로드. 1회는 백두산을 포함한 만주지역여행이었고 2회는 서안을 곁들여 계림, 소주, 항주, 상해를 잇는 중국 화남지방여행, 3회는 막부시대 일본의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항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연계가 깊었던 큐슈지방탐방이었다.
서원대학 학생, 교수, 직원과 일부 외부인들로 구성된 50명의 해외문화탐방단은 10박11일의 일정으로 떠났다. 우리가 택한 코스는 실크로드 가운데서도 천산북로였다. 인천공항에서 몸을 싣고 실크로드의 첫 출발지이자 중국의 천년고도인 서안으로 향했다. 서안은 1928년 개명되기 전까지는 장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곳이다. 섬서성의 서안에서 시작하여 감숙성의 난주, 주천, 가욕관, 돈황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투르판, 우르무치와 그 주변 지역의 유적지가 우리의 탐방대상지였다.
우리는 편의상 먼저 서안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르무치로 비행한 다음 낮에는 버스 밤에는 침대열차를 이용하여 첫 출발지 서안으로 되돌아 오는 방법을 택했다. 서안에서 우르무치까지의 비행거리는 약 2000㎞, 우르무치에서 서안으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탄 버스거리 2000여㎞, 열차거리 1000여㎞하여 도합 5000㎞의 여정이었다.

실크로드와 천산남북로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명명한 실크로드는 비단실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진 길이긴 하지만 비단처럼 부드러운 길은 결코 아니었다. 부드럽고 화려한 비단을 얻기 위해 자갈과 흙모래가 뒤섞인 황량한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따가운 모래바람 그리고 험준한 파미르고원을 목숨을 걸고 헤쳐가야만 했던 기회와 모험의 길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언저리를 거쳐가는 길을 서역남도, 북쪽 언저리를 거쳐가는 길을 서역북도라 하였고 그 동쪽 합류점은 돈황이었다. 남도 아래쪽에는 곤륜산맥이 북도 위쪽에는 천산산맥이 버티고 있었다. 4C이후 남도지역이 사막화되고 새로이 천산북쪽 기슭의 천산북로가 열리자 서역북도는 천산남로로 개칭되었다. 이 천산남북로의 동쪽 합치점은 하미였다.
서쪽 사람들에게는 비단을 얻기 위한 길이었으나 고대 중국인들은 이 길을 통해 피땀을 흘리며 하늘을 날 듯이 빠른 천마나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한 길이었으니 그들은 이길을 실크로드라 하지 않고 서역도, 천산로로 이름하였던 것이다. 이 길은 물질을 얻기 위한 길만도 아니었다. 열린 길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지역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와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 마니교까지 전파되었다.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서역지방은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후 고구려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 20만명을 끌고가 풀어놓은 사막지대가 투르판이요 고선지 장군이 활약한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이 투르판 부근 교하고성이다. 당나라 현장법사 곁에서 오른팔 구실을 하던 신라고승 원측의 탑이 있는 곳은 서안부근의 흥교사(興敎寺)다.

실크로드와 만리장성

중국 역사상 최대의 3대 구조물은 만리장성과 북경. 항주간 운하인 경항은하 그리고 서역지방 오아시스 도시의 지하수로(5400㎞)인 카레즈다. 만리장성은 춘추전국시대 여러 제후국들이 자신들의 국경지대에 쌓은 성을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흉노방어를 위해 연결, 수축한 5000㎞(1리는 0.5㎞)의 장성이다.
유목민족에 대한 방어는 권력의 안정에 절대절명의 명제였다. 외적방어와 함께 권력자의 수명유지 또한 권력유지의 관건이었으니 진시황이 왕위에 오르자 이내 자신의 능묘 건축에 착수한 것은 그를 통해 장수할 수 있다는 믿음때문이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수천의 동남동녀를 동해로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하지만 끝내는 황제 즉위 10여년만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권력과 왕조유지를 위해 수축한 장성건설과 능묘건축은 민생을 피폐케하였고 그 여파로 그의 사망 직후 반란이 속발하여 진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진나라의 장성을 서쪽으로 수백㎞연장하여 돈황 서쪽 옥문관(玉門關)까지 이르게 한 이가 바로 한 무제였다. 그는 가욕관에서 400㎞가까이 떨어진 돈황에 까지 군(郡)을 설치하였고 고비사막 북쪽의 흉노세력을 제압하고 장성을 쌓아 서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이어 그는 한반도에도 한의 4군을 설치하였는데 이같은 해외원정의 승리 뒤에는 서역 대원(大苑)국에서 들여온 튼튼하고 날쌘 한혈마가 있었다.
오늘날 중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북경 부근 팔달령의 만리장성이나 가욕관의 장성은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진,한시대 장성에 비하면 훨씬 남쪽으로 내려왔을뿐 아니라 서쪽지역도 상당히 축소된 것이다. 명대 몽고 방어를 위해 쌓은 가욕관의 관문과 성벽은 고대의 토성과는 달리 돌과 구운 벽돌로 튼실하게 축조되었다. 공사가 끝났을 때 남은 자재가 벽돌 1장뿐일 정도로 공사집행이 빈틈없었다는 것은 당시 축성에 들인 공력과 기술을 가늠케 해준다.
청조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건설한 왕조여서 북방유목민족을 겨냥한 장성의 의미가 축소된 면이 있다. 그러나 가욕관에서 돈황쪽으로 진행하다 마주치는 교만(橋灣)성 유적은 성의 의미가 청대에도 건재함을 보여준다. 강희제(1662-1722)는 교만지역에 방어성을 구축하여 신강지역 유목민들의 분란이 파급되지 않도록 정금산(程金山)부자에게 거금을 주어 보냈지만 그들은 조그만 성을 쌓고는 나머지 금액을 착복하였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강희제의 노여움은 대단하여 두 아들의 등껍질로 북을 만들고 정금산의 두개골로는 잔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성 부근에 황족 사원을 짓고 북경에서 10명의 도사를 보내 하루 3번 사람가죽으로 만든 북을 울려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니 실크로드 주변의 성에 얽힌 참혹한 고사로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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