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선 이름도 사라지는 비정한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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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선 이름도 사라지는 비정한 ‘의리’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5.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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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체육회관 조형물 기증자 공방의 진실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의 충북체육회관 앞엔 아주 역동적인 조형물이 하나 있다. 남자가 원반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대형 화강암 조각품이다. 지난 95년 이 체육회관이 도민들의 거국적 성금으로 준공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충북 체육회관은 여전히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소년체전 7연패와 71회 전국체전의 성공적 개최를 기념해 설립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당시의 건립과정이 무용담으로 전해질 정도로 큰 의미를 안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조형물에 새겨진 기증자의 이름을 놓고 요즘 당사자들 사이에 아주 재미나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원래 이 조형물의 기증자는 체육인으로 잘 알려졌던 고 곽우영씨다. 지난 96년 12월 59세로 사망한 곽씨는 당시 음성에서 (주)청원물산이라는 채석장을 운명하며 이 조형물을 제작해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자신이 아닌 아들 곽모씨(26)로 했던 것. 논란은 아들 곽씨 이름이 지역인사 K씨(전 충북레슬링협회 부회장)로 바뀐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지금 이 조형물의 표지석엔 ‘하면된다. 충북레슬링협회 부회장 000(증)’으로 표기되어 있다.

최근에야 조형물 기증자의 이름이 바뀐 사실을 알게 된 곽우영씨 유족측이 도체육회에 원상복구를 요구했지만 아직 시정되지 않았다. 결국 과거 곽우영씨를 따르던 후배들이 이 문제를 본격 거론하게 됐고, 이 때문에 도체육회와 당사자들이 아주 곤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곽우영씨의 부인 이원경씨(58)는 이에 대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최근에야 그런 사실을 알고서 너무 황당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기증자의 이름을 그런식으로 멋대로 갈아치울 수 있나.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속한 원상복구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아들 곽씨(대학 4년)도 “ 내 이름이 이미 오래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로선 꼭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심정이다. 내가 어릴 때 조형물이 세워져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체육회쪽에 시정을 요구했는데 아직 행동이 없다. 스스로 원상복구를 안 하면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강경입장을 표했다.

그러나 당시 체육회 관계자는 기증자 교체는 유족의 양해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도체육회사무처장을 지낸 정모씨는 “문제의 조형물은 K씨가 돈 2000만원을 대 제작했다고 들었다. 곽우영씨도 생전에 나한테 K씨가 돈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곽우영씨 사후인 97년쯤에 K씨로부터 이의가 제기됐고 이를 유족(부인)에게 알렸더니 이름을 바꿔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유족으로부터 충분한 양해가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유족측의 주장은 다르다. “당시는 집안문제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었지만 조형물의 이름 교체를 용인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다. 고인이 살아 생전 주변에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문제의 조형물에 대해 큰 긍지를 갖고 있었다. K씨가 돈을 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다. 고인의 성격상 결코 그럴분이 아니다. 만약 K씨가 돈을 냈다는게 사실이라면 조형물을 세울 때 본인의 이름을 새길 것을 주장했어야 한다. 이제 와서 당치도 않은 말을 만들어 내면 어떡하자는 건가. 고인과 K씨 사이엔 아무런 채권 채무관계가 없다. 우리는 원래대로만 고쳐주면 그만이다. 문제가 확산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 않다. 세상 인심이 이렇게 변했나 싶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충북수영연맹 9대 회장(81~82년)을 지낸 곽우영씨는 한 때 도내 주먹계의 대부로 불리기도 했지만 말년엔 많은 사회활동으로 주변에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한때 충북을 대표하는 레슬링 선수로도 활약한 그는 특히 체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자신이 맡은 수영을 전국 최고의 수준으로 키웠고, 후배들에게도 각별한 신망을 받는 ‘의리파’로 통했다. 고 곽우영씨와 K씨의 사이도 소위 형님 동생으로 통했던 관계로, 조형물의 기증자 이름이 바뀐 것에 대해 주변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거나 안타까워 하고 있다. K씨는 체육회관 초기 구내식당 운영을 맡기도 했다.

자신을 곽우영씨 후배라고 소개한 한 인사는 “나는 기증자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더 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빨리 시정했으면 한다. 그 분(곽우영)은 생전에 우리보고 비겁하다고 생각되면 행하지를 말라고 항상 강조하셨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일은 너무하다. 의리를 생명으로 여겨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설령 K씨가 돈을 댔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갈아치우는 건 먼저 간 분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상황을 지켜 본 후 강력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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