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가꾸기와 인간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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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가꾸기와 인간의 존엄성
  • 충청리뷰
  • 승인 2019.09.0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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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원 근 법무법인 ‘청주로’ 변호사
오 원 근 법무법인 ‘청주로’ 변호사

 

요즘 집안에 일이 있어 몸과 마음이 무척 바쁘다.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여유가 없다. 마치 행자생활을 하는 것 같다. 10년 전에 한 100일간의 출가 행자생활은 공부삼아 한 것임에 반해, 지금은 실전이다. 이렇게 쫓기는 가운데서도 주말이면 보은 텃밭에 간다. 200평 면적에 비닐을 쓰지 않아 풀을 일일이 관리해야 하니, 손이 많이 간다. 그래도 텃밭에 가는 것이 나에겐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지난 주말엔 아쉽게도 일요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일주일 만에, 내가 아끼는 해바라기가 꽃을 더 많이 피웠다. 2m도 넘는 큰 키에,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샛노란 꽃을 만들어낸 모습이란. 반 고흐가 왜 해바라기에 빠졌는지 이해가 될 듯 했다.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이번에는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검은색이 햇볕에 반짝이는 모습이 내 눈을 맑게 해 주었다. ‘검은색도 저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하면서 눈을 옆으로 돌리는데, 거기서 내 마음이 완전히 열렸다. 붉게 물든 청양고추의 무리가 초록색 잎들 사이에서, 가지와 마찬가지로 햇볕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합창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내 입에선 저절로 미소가 터져 나왔다.

노란 해바라기, 파란 하늘, 검은 가지, 붉은 고추, 초록 고춧잎. 이 다양한 색깔을 느끼면서 최근 무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색깔들이 내 손길과 함께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텃밭 가꾸기의 매력이다.

내가 이렇게 텃밭농사에 빠진 데에는 나름대로 배경이 있다. 난 가정환경 때문인지 어려서 굉장히 소심했다. 성격이 어둡고 열등감이 많아 스스로를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다. 친구가 없었고,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대학 3학년 절에서 운영하는 고시원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했는데 그 때도 어릴 때처럼 성격 걱정을 많이 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소심하게 살지 말자,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살자결심을 했다. 그렇게 하니 몸과 마음이 무척 편하고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불안과 함께 몸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매일 오후 5시 고시원에서 왕복 50분 걸리는 암자로 산보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고시원에서 나오기 전까지 약 3개월간 정말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머리에 눈을 소복이 이고 돌아왔다.

그렇게 매일 거닐면서 바라본 나무들은 다 당당해 보였다. 음지에서 힘겹게 자라는 나무도 전혀 비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서 ‘봄이 되면 정말로 싹이 틀까’ 하고 괜한 의심이 들었다. 정말로 쓸데없는 의심이지만, 매일 하는 산보 속에서 그 의심이 커져갔다. 그렇게 커진 의심 끝에 봄이 되자 나뭇가지에서 싹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본 순간, 마치 죽어있던 내 몸에서 싹이 나는 것 같았다. 아, 나도 저렇게 살아있구나. 그때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자연에서 큰 가르침(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이때부터 자연을 가까이하고 자연스럽게 살려고 노력했다. 생태농사는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전주, 인천, 서울에서 검사를 하면서 작은 평수를 분양받아 주말농장을 했고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 서울생태귀농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이어져 지금은 텃밭을 크게 넓히고, 오두막을 짓고,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전부 퇴비로 만들며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특성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획일화를 가져온다. 프랜차이즈의 일반화로 청주, 서울, 부산서 먹는 음식이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문화도 획일화되었다. 남과 다른 나만의 고유함은 있는가? 우린 똑같은 사료를 먹는 소,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텃밭농사는 그렇게 천박한 획일화를 거부하고, 나만의 고유함과 존엄성을 간직하기 위한 숭고한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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