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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이승만 사주 받았나? "군대 때문에 김구 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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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이승만 사주 받았나? "군대 때문에 김구 살해"
  • 충청리뷰
  • 승인 2019.09.1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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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이승만 사주 받았나? 경교장서 살해이유 재조명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이승만 사주 받았나? 경교장서 살해이유 재조명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배후, 이승만 사주 받았나? 경교장서 살해이유 재조명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에 배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박기서는 1996년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죽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는 글자를 적은 후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를 때려죽였다. 

그는 범행 이후 벌어진 재판 최종심에서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에 따르면 "박기서의 행동이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박기서의 행동이 법질서 전체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진다고 옹호한 셈이다.

다만 계획적인 살인에 적은 형량을 부여한 법원의 판단은 법이 국민정서를 이유로 사적인 살해를 일정 부분은 용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편 김구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6년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해 학무총감에 추대돼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았고 안명근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이 추가돼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됐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돼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했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했다.

특히 1933년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었다.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을 초빙해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 후 오로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이후 "이승만 사주를 받아서 김구를 살해했다"는 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당시 안두희는 검찰에서 ‘김구가 군대를 자신을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하려 하기에 응징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의 쿠데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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