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고 성장하면 다 해결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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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하고 성장하면 다 해결된다고?
  • 충청리뷰
  • 승인 2019.09.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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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성장만 추구하니 부문간·지역간 불균형 초래
신 동 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신 동 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왜 우리는 지게를 지고 논둑길로 다녔을까? 왜 일본의 침탈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을까? 대중교통문제 주제와 무관한 질문 같다. 우리는 교통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보다 빨리 효과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만 국한하는데, 그것은 교통의 극히 일부 기능을 전체인 것처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교통은 지역의 자원을 배분하는 데 공간적·시간적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회발전전략들의 핵심이다. 기존의 발전론 관점에서 보면 논둑길보다 신작로, 철도가 더 발전하였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그 길이 외부에 의해서 이식되었어도 발전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으로 내재적 발전론이 등장한다. 조선 내에서도 그 싹이 트고 있었고, 일본제국주의가 아니어도 조선내에 발전의 싹이 트고 있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든 근대화발전론이든 식민지근대화론이든 같은 근본적 맹점을 안고 있다. 모든 근대화론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을 발전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물류를 할 수 없는 논둑길은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문제가 된다. 왜 중국은 전근대에 서양보다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에 자본주의로 가지 않았고, 해양으로 나가지 않았을까?라고 묻지도 않는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논둑길의 지게를 역사의 정체라고 할 수 있는가? 총칼을 앞세워 침략과 약탈을 일삼은 식민주의가 발전인가? 약탈적인 근대화의 표상이 바로 도로이다. 자급적 지역경제의 농업사회에서는 ‘길’이면 충분했다. 삶이 평화롭게 공존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조선이 평화와 공존, 정의의 가치가 구현된 이상적 체제였다는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팽창과 수탈을 통해 지탱되는 제국주의체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필요에 의해 도로 건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가 조선에게 근대화 토대를 제공했다고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타자가 어떤 사회에게 어떤 특정 가치를 강요-더더구나 물리력에 근거한 강요는 말할 것도 없다-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설령 발전, 인권, 평화라고 해도 말이다.

이 땅의 도로는 그렇게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의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도로는 그 시작부터 이 땅과 민중의 희생을 강요했고, 저들의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물량공세가 도로를 타고 조선의 자급자족적 지역경제기반을 초토화시켰다. 조선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공통점은 발전을 꾀한다는 데 있다. 차이는 발전의 동력과 주체이다. 양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조선의 발전의 경로는 산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제 3, 제 4의 길도 있는데, 이 두 관점의 인식틀은 기본적으로 근대화이며, 양적발전을 목표로 하다 보니 발전의 질적 측면, 발전의 다양성, 다양한 경로에 대해선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근대화발전을 추진한 결과 도로는 총연장이 1947년 24,432km에서 80년 50,336km, 2004년 100,277km로 24년만에 두 배 증가하여 10만을 넘었고, 2018년 현재 110,714km에 달한다. 고속도로는 동서남북 26개 노선이 한반도를 바둑판의 선처럼 누비고 있다. 또한 이 도로(도로, 철도, 주차장) 면적은 2017년 현재 전국토 면적 3.4%로 34만 2843ha이고 이 위를 달리는 자동차(2018)는 2,300여만 대이다. 인구 2.3명 당 1대 꼴이다.

그리고 2016년에 우리가 사용한 총 에너지는 2억 1541만 9000 toe(석유환산톤, 원유 1톤이 갖는 열량)로 이 가운데 52%는 석유, 전기가 20%, 석탄이 13%, 천연가스 12% 등이다. 부문별로 에너지 사용을 보면 산업용 60%, 수송이 21%, 가정이 10%, 상업공공부분이 9%를 차지하고 있다(2017년 산업부 ‘에너지총조사’).

‘짧은 시간에 발전’의 의미
통계를 보면 그 수치가 객관적 실체에 접근하는 것 같지만, 그 실상이 어떠한지 감을 잡기 쉽지 않다. 다만 짧은 시간에 양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짧은 시간과 양적 발전 모두에 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결과를 낸 것은 ‘사회적 집중’을 보여준다. 집중은 다름 아닌 사회적 맹목, 무비판적 수용, 사회적 억압이었다. 그렇게 ‘발전과 성장’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달렸다.

발전하고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경제성장은 국정지표가 되었다. 그 국정지표는 국민들 머릿속도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 삶과 사회에는 이제 경제만 있고 다른 것은 없게 되었다. 지금 사회의 여타 문제가 성장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처럼 여전히 성장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게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다 보니 부문간·지역간 균형 발전, 유기적 발전은 장애물이 되었다. 오히려 제한된 자원(인적, 물적, 자본 등)의 효율적 동원을 위해 불균등발전을 전략적으로 추구했다. 그 결과 지역은 고사 직전이다. 그렇다면 지역을 살기 위해서 이런 발전전략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는데, 지역도 그것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효율적이고 편리한 대중교통망을 구축한다 해도 성과가 날 수 없고,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망도 구축할 수 없다. 성장중심의 불균등 발전전략은 지역과 지역 자원, 그것들 간의 유기적 발전에 대한 고려가 없다. 이런 불균형을 수정하고자 참여정부시절에 전국으로 많은 기관을 분산 배치했다.

 

균형발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진전이었지만,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균형발전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발전과 성장, 속도,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바라보고 문제제기할 시점이 왔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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