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성’과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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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월성’과 욕망
  • 충청리뷰
  • 승인 2020.01.1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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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직언직썰 홍승표 길동무작은도서관장

 

며칠 전 핵발전소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월성’을 보았다. 이런 영화를 보면 바꾸어야 할 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이기에 한편으로 시원하지만 실제로 바꿀만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서 속상하고 답답하다. ‘월성’도 그랬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이 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지는 전기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 발전에 드는 비용과 고통을 큰 도시들이 많이 부담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서울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경주 월성에 핵발전소가 서 있고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갑상선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에 더 많이 걸리고 더더욱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병이 핵발전소 때문인지 명확히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법원의 애매한 판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영화에서 흘러나올 때 화면을 보고 있는 내 맘도 불편하다. 내가 큰 고민 없이 손쉽게 써대는 전기가 핵발전소를 가동시키고, 그 발전소의 가동이 월성 주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핵발전과 주민들의 고통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말할 때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나 학자들의 이야기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내게는 이 문제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가릴만한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오랫동안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당하는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최선을 다해 함께 찾는 것이 정부와 핵발전소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짐작컨대 그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통에 눈감고 기계에너지와 핵에너지가 동물과 인간의 에너지를 대체하고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산업의 진보가 무한히 생산하고 무한히 소비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고 눈을 가린다면 몰라도 숨 고르고 차분하게 우리네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문제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죽하면 한 인문학자가 삼 년 전쯤 <앞으로 10년, 대한민국 골든타임>이란 제목의 책을 쓰면서 ‘가만히 있으면 망한다’는 부제를 달아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을까.

이런 여러 복잡다단하고 심각하기까지 한 문제들이 어디서 왔을까. 결국 돈이다. 다른 말로 하면 끝 모르는 욕망이다. 벌써 오래전에 읽은 책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를 다시 펼쳐보니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오슬로에 왔던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했다는 말이 눈에 띈다. “과감하게 상황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초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가진 이 초인은 초인적인 이성을 갖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초인은 힘이 자라는 만큼 점점 더 가엾은 인간이 됩니다. 우리의 힘이 자라나 초인이 될수록 우리 모두가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더욱 높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된 초인이 초인적인 이성을 갖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힘이 자라면 자랄수록 가엾은 인간이 된다는 지적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조건 커지고 많아지고 강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반세기 쯤 전에 이미 슈바이처는 내다보았다.

아내는 영화 ‘월성’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에게 제안한다. 전기로 쓰는 정수기를 수동정수기로 바꾸는 소소한 것부터 시작하자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 아낌 만 한 게 없다(治人事天 莫若嗇)고. 경전의 힘이 당장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해도 옛 어른들의 슬기를 믿고 아낄 색(嗇)이라는 글자 하나 등불처럼 들고 경자년 새해를 걸어가 보리라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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