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아니라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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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아니라 이웃이었다
  • 충청리뷰
  • 승인 2020.04.2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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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상 청주대 법학과 교수
조한상 청주대 법학과 교수

 

깜깜이 선거의 기세는 투표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른바 경합지역은 엎치락뒤치락을 이어갔고, 우리 지역 충북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날 유난히 표정 어두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마음으로라도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선거 패배를 재앙처럼 받아들이는 사람, 당장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은 심정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선거를 비롯한 제도화된 민주주의만 가지고 민주주의가 작동하지는 않는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패자를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빼앗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패했다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쳐야 하거나, 가족이 괴롭힘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일도 벌어져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승리했건 패했건 우리는 그냥 평소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 의견은 다를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사명감 넘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화의 문제이며 매너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다소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해 왔지만, 그 과정이 원만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이유가 무엇이건 패배한 정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곤 했다. 경쟁하는 정파를 빨갱이로 아니면 토착 왜구로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안에서 제거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서로를 향한 막말과 혐오 표현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최근 사례를 통해 막말의 궁극의 경지가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방송, 신문, 유튜브까지 선동적 비평가들은 상대 정파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언어들을 쏟아 놓는 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정치적 양극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의 결과는 무엇일까? 하버드의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최근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정치적 양극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대립하는 정파의 간극과 대립이 깊어지는 현상이다. 결국에는 정치적 경쟁자를 사라져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민주주의 제도는 문자 그대로 무기로 바뀐다. 언어적 또는 물리적 폭력에 대한 저항감이 조금씩 낮아지고, 어느 순간 용인되기 시작한다. 타격을 받은 세력은 혼자 고고하게 페어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받은 만큼 갚아주는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상호관용이라는 민주주의의 문화는 사라지고, 폭력과 파괴의 상승작용이 벌어지게 된다.

각 정파의 지지자들은 지금까지 이야기가 불편할지 모른다. 상대 정파가 실제로 ‘악’에 가깝다거나, 적어도 우리 정파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양비론의 함정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점이고, 정치적 양극화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주 단순하다. 패자는 승복하는 것이고 그보다 앞서 승자는 아량을 갖는 것이다. 각 정파와 그 지지자들은 다시 정직함과 사명감을 가지고 경쟁에 나서는 것이다. 2020년 총선 이후 승복과 아량, 그리고 상호 존중의 민주주의 문화가 싹을 틔워 정치적 양극화 해소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우리가 적이라고 칭했던 그 사람들은 알고 보면 우리의 가족이고,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의 동료고 또 우리의 이웃이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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