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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과연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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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과연 존재할까?
  • 충청리뷰
  • 승인 2020.05.0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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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려 금속활자본 찾는 노력과 연구 필요한 시점

 

직지와 함께 최근 들어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본이 세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는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목판본과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상정예문의 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는 진양공 최이가 1239년에 쓴 발문에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새긴다는 기록이 있다. 이 번각 목판본으로 삼성출판박물관(보물 제758-1호, 1984. 5. 30 지정)과 공인박물관(보물 제758-2호, 2012. 6. 29 지정) 소장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가운데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이란 주장이 제기되면서 언론에서는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 처음 발견되었고, 국내에서 존재 사실조차 전혀 몰랐다고 보도하였다.

공인박물관의 주장 근거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중국 당나라 현각선사가 선종의 6조 혜능을 뵙고 하룻밤에 크게 깨달은 것을 시로 읊은 증도가를 보고, 송나라 남명 법천화상이 계송(繼頌)하여 깨달음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힌 책이다. 이 책은 법천화상이 천경산에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1076년 7월에 절강성 염창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공인박물관 소장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박물관 소장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고려에서는 염창본을 수입하여 금속활자로 간행하였는데, 언제 인쇄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금속활자본을 번각한 목판본의 기록은 1239년 9월에 진양공 최이가 쓴 발문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발문에 따르면 장인을 모집하여 금속활자본을 다시 새겨 오래도록 그것이 전해지게 한다고 하였다. 즉, 그 저본이 된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1239년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현재 번각 목판본은 보물 지정본과 개인 소장본 등이 있다.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① 최이의 발문에 수록된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의 해석을 초조 주자(금속활자)가 실패한 후 거듭 주조하여 완성한 주자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최이의 발문은 번각본의 것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의 발문이라는 것이다. ② 공인박물관본은 삼성출판박물관본과 동일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본의 첫째장과 마지막 장의 비교와 광곽 주변의 글자를 비교하였는데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③ 공인박물관본의 너덜이, 획의 탈락, 보사,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 등을 분석한 결과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삼성출판박물관본, 공인박물관본, 개인 소장본 등 3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① 최이의 발문이 3종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 중조주자본은 금속활자본을 거듭 새긴다는 의미로 해석의 오류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② 광곽(테두리)에 떨어진 흠결이 서로 같게 나타나고 있다. 공인박물관본이 금속활자본이라면 번각하면서 광곽까지 동일하게 흠결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③ 판심에는 각수(목판을 새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수는 득, 동백, 진재, 당보, 공대, 오준, 일명, 이세, 원휘, 사집, 숙□ 등 11명이었다. 각수 한명이 적게는 2판에서 많게는 6판까지 새겼다. 이들은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새긴 각수와 동일 인물들이다. ④ 글자의 목리나 칼자국 등이 3본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너덜이, 획의 탈락, 보사, 활자의 움직임,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는 동일 판을 인쇄하면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점들이지 금속활자본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은 아니다. ⑤ 3본 모두 계선(경계를 나타내는 선)이 없다. 금속활자본이라면 활자를 조판하기 위한 계선이 있었을 것이다.

공인박물관본은 후쇄 목판본
이어 ⑥ 3본은 동일한 목판을 시기를 달리하면서 인쇄한 것이다. 동일 판본도 후쇄본의 경우 기존 판이 닳게 되면 글자의 획이 굵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판의 마멸이 심한 경우 다시 다듬고 손질하는 과정에서 글자 획이 가늘어지고, 글자나 광곽 등이 살아나는 현상을 배제할 수 없다. ⑦ 개인 소장본에는 인수대비가 선왕(세조, 예종)과 죽은 남편(덕종) 그리고 부모(한확과 부인 홍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한 것을 1472년 6월에 김수온이 작성한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개인 소장자가 의도적으로 없앤 인수대비 발문
개인 소장자가 의도적으로 없앤 인수대비 발문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이때 간행한 서적은 묘법연화경 등 29종 2,805부에 달한다. 그중에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200부를 간행하였다. 이는 목판의 인쇄 연도를 알려주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개인 소장자는 이 책을 고려본으로 만들기 위해 인수대비 발문을 의도적으로 없앴다. 그래서 문화재청으로부터 보물지정이 부결됐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문화재를 훼손한 개인 소장자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 ⑧ 3본의 광곽과 판심·인출된 글자 획의 상태·가필의 흔적 등을 비교 분석한 결과 그 위치가 모두 유사하여 동일 목판으로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쇄는 삼성출판박물관본, 개인소장본, 공인박물관본 순으로 인쇄 시기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남명천화상송증도가 3본은 1239년에 금속활자본을 번각한 목판을 조선시대에 인출시기를 달리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인출시기는 삼성출판박물관본, 개인소장본(1472년), 공인박물관본 순이다. 따라서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한 공인박물관본은 3본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인출된 후쇄 목판본이다.

1200년대 초에 고려는 지식정보를 전달할 필요성에 의해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그 기록을 상정예문과 남명천화상송증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직지가 그 증거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국내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금속활자 발명국으로서 국격과 그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고려 금속활자본을 찾는 노력과 함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과 노력이 요구된다.

/ 황정하 서원대 교양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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