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과 종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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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과 종교라는 것
  • 한덕현
  • 승인 2020.08.2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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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전광훈 발 코로나 위기감이 심상치 않다. 사상 초유의 장마와 홍수를 겪은 후 그야말로 고난의 시기를 지나 이제 좀 숨통이 트이나?를 내심 기대했던 국민들은 또 다시 공황 상태가 됐다. 다른 곳도 아닌 종교라는 영역으로부터 사달이 났다는 점에서 국민 실망감은 더욱 크다.

관심은 많지만 그렇다고 특정 종교를 갖지 않은 무신론자의 처지에서 전광훈의 도드라진 종교활동을 시비하고 싶지는 않다. 꼭 과거 민주화시대의 종교 역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론 인간세상의 순화나 전향적 발전을 위한 종교의 사회 참여와 간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이다. 그렇더라도 전광훈이 논란을 빚을 때마다 느낀 감정은 그의 언행이 상식과는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가 주도하는 대중집회에 성조기와 일장기가 휘날리는 것부터가 그렇다. 종교의 현실 참여는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종교라는 것의 원초적 맹신성(盲信性)도 실패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광훈의 대중집회가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그들만의 배설로 그치는 이유가 바로 그렇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기성 종교관이 전광훈이라는 다소 헷갈리는 목회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환호작약하는 작금의 현상을 만들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저 부담스럽고 역겨울 뿐이다. 전광훈의 무모함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종교라는 이미지에 천박성을 각인시키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지난 신천지 사태를 전후로 갑자기 주목받았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도 이 점을 분명히 경고했다. “종교심이 깊어질수록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함께하는 세상,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지만 종교가 성장을 멈추면 종교는 자연히 치부나 치병같은 사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된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신도들이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신도들이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져야 컨트롤하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오교수가 특히 천착한 것은 인공지능과 첨단과학의 시대에 세계적으로는 종교무용론이 득세하면서 탈종교화가 두드러지는 데도 오히려 한국에선 신격화 된 특정인을 모체로 하는 신흥종교가 발흥하는 현상이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최대 문제는 ‘성경 문자주의’라고 일침하며 성경에 있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접근이 신천지같은 현상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그가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라는 책까지 내며 사람들에게 깨우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표층 종교를 뛰어넘어 심층 종교, 즉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 지성을 넘어 영성에서 ‘참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에 기대어 무엇을 바라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삶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의 섭리에 대한 위대함을 깨우치려는 의지, 그 것을 향한 신앙을 진짜 종교라고 여겼다.

수뢰혐의로 구속되어 4년 3개월을 복역하다가 지난 연초에 가석방된 임각수 전 괴산군수가 종교에 대한 기발한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종교를 버렸다”고 했다. 본인이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겪는데도 그토록 믿었던 종교와 신앙이 도움이 안 됐다는 게 이유였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하늘은 모든 것을 헤아린다’거나 ‘신은 전지전능하다’는 말들이 허상으로 느껴졌고 없는 죄를 만들어 5년씩이나 옥살이를 시키는데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위선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의 종교관이 무엇이든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광훈 /뉴시스
전광훈 /뉴시스

 

사실 종교는 이처럼 기복(祈福)신앙의 발로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힘들고 불안하고 결핍을 느낄 때 뭔가 외부의 도움과 손길이 필요하고 인간은 이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종교를 고안해 냈다. 그래서 종교는 선하고 깨끗해야 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를 보면 같이 아파해야 하며 부정과 죄악에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체를 확인할 때만이 인간의 믿음은 완벽해 질 수 있다. 안 그러면 20세기 지성을 대표한다는 러셀이 고민했던 것처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되물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떨쳐버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입증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고, 종교는 공포심이 기반이기 때문에 이성적이지 못하며, 그러기에 인간에게는 종교보다는 합리성과 관용이 더 필요하다는....

미천한 발상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종교는 곧 경외주의(aweism)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든다. 며칠 전엔 무심천을 걷다가 메뚜기와 풍뎅이들의 짝짓기를 목격하고선 이런 생각을 또 곧추세우게 됐다. 그저 본능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의 인간이 만들어진 것도 그렇고 그 작은 미물들의 세상도 그렇고 더 나아가 지구를 비롯한 우주의 탄생과 질서를 떠올리면 어느 절대자에 대한 경외가 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만의 종교인 셈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이라는 ‘절대자’를 마치 애들 다루듯 폄훼한 전광훈은 원초적으로 신앙인의 자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했지 않은가. 까부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종교를 등에 업고 개념없이, 어느 땐 치기 어린 행동을 보이는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런 그가 요즘은 종교인이 아니라 아예 정치인보다도 더한 언행을 일삼는다.

종교의 사회 참여와 간여가 제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종교가 세상에 너무 노출되면 이는 곧 역사의 큰 불행이 됐다. 제정분리와 정교분리가 만고의 진리인 이유다. 로마제국은 기독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고려는 요승 신돈으로 상징되는 불교의 타락으로, 그리고 조선은 당쟁의 원흉인 유교의 부패로 최후를 맞았다. 더군다나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게 되면 무자비한 반 역사의 퇴행물이 된다. IS와 탈레반의 극단주의가 좋은 예다. 그런데도 전광훈의 태극기 집회에 얼씬거리는 정치인들이 있다니 어쩌자는 것인가. 그들의 뇌와 그들이 속한 조직의 정체성이 궁금해진다.

12제자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유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였다. 한데 이만희의 신천지와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는 사랑은 커녕 서로 코로나를 전파했으니 그들이 국민 밉상이 된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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