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식을 원망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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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식을 원망해야 하나요
  • 한덕현
  • 승인 2020.12.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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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조두순이 출소하던 날의 풍경이 참으로 무겁게 다가왔다. 일개 파렴치범이 언론에 이처럼 부각되고 조명받는 게 정상인지를 몇 번이고 되물었다. 이날 세계적인 외신들도 조두순의 출소를 놓고 빚어지는 국내 논란을 비중 있게 다뤘다. 조두순이 ‘주취감경'(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한 자의 형을 줄여주는 것)을 받았다는 점과 과거 한국에선 성범죄자에 대해 약한 처벌이 내려졌다고 특파원의 입을 빌어 전했다.

나름 긍정적인 충고도 있었다. NYT는 “한국에서 조두순이라는 이름은 ‘성범죄자 솜방망이 처벌'과 동의어가 됐다”면서 “한국 사법부는 화이트칼라 범죄자와 성범죄자를 처벌할 때 관대하다는 의혹을 오랫동안 받아왔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국 검찰이 더 강한 처벌을 위해 항소할 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이 뉴스는 최근의 공수처 공방과도 묘하게 오버랩됐다. 외신중에는 조두순에게 쏟아지는 한국의 과잉 반응, 예를 들어 최재과열이나 그에게 집중된 국가, 사회적 보호와 감시 등이 과연 적정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보도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앞으로 조두순에게 쏟아부을 국가인력과 세금을 생각하면 참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무리 민주국가라고 하지만 어린 아이의 삶을 망쳐놓은 극악의 성범죄자를 마치 무슨 의인이나 되는냥 지켜야 한다는 현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24시간 밀착 감시를 위해 수십대의 전용 CCTV를 운용하고 주기적으로 국가와 지역사회가 할수 있는 모든 관리, 감시 시스템을 가동한다니 이보다 더한 대접도 없겠다. 그래도 이 것들로 인한 사생할 침해가 우려될 수 있다는 걱정은 ‘피해자에게 사과할 의사는 없냐’는 취재진들 질문에 양손을 뒷짐진채 고개만 까딱하며 건성으로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선 돌연 분노로 바뀌었다.

어쨌든 상식적이지 않다. 가뜩이나 윤석열 파동으로 비상식적인 것에 지쳐있는 국민들은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조두순을 바라보며 또 한 번 상처를 받는다. 때마침 미국에서 들려온 트럼프의 사형집행 소식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나에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이유는 뭘까. 자신의 어린 딸을 학대, 살해해 2004년 사형이 선고됐던 아버지와 목사부부를 납치 살해한 공범이 같은 교도소에서 독극물 주사주입 방식으로 사형당했다.

실질적 사형 폐지국인 우리나라의 마지막 사형 집행일은 1997년 12월 30일이었다. 사형제도를 반대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97년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 트럼프처럼 퇴임이 두 달도 안 남은 시점에 23명의 사형을 결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조두순이 출소하던 지난 12일, 클릭과 구독에 목을 매는 몇몇 유튜버들은 자신들에게 조두순을 넘겨주면 “즉각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두순에 대한 국민적 원망이 이처럼 크다는 것을 악용한 처사다. 그래도 잘못에 대해선 분명한 응징이 있어야 나라에 믿음이 간다.

국민들에게 상식의 감성을 무너뜨리는 현상은 또 있다. 아들의 제삿날에 거리로 나온 고 김용균 어머니의 노숙 투쟁과,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절규다. 요즘 방송의 한 공익광고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업재해의 위험성을 주제로 한 공익광고다. 매일, 무려 7명이 산업 현장에서 안전사고로 숨지는 현실을 고발하는 광고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보는 이들에게 남의 일이 아닌 내일처럼 느껴지게 하니 말이다.

출근하면서 아들과 놀기로 약속한 아버지가, 고향 부모님을 뵙겠다고 다짐한 아들이 사고를 당해 결국 “오늘 퇴근을 못했다”는 의미의 시그널을 접할 때마다 중대재해를 일으키고도 처벌은커녕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기업들이, 또 이를 해결하겠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하고도 이 핑계 저핑계로 입법을 미루는 정치권이 원망스럽다. 막상 그들도 당해봐야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애처롭게 외치는 저 뜻을 이해할까? 이 추운 겨울에도 상식이 숨쉴만한 따뜻한 공간은 없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끝내 시지프스의 형벌로 남을 것인가. 될 것 같은데도 안 되고 또 할 것 같은데도 답이 없고, 적어도 문재인 정권에서는 속 시원한 답이 나오겠지 기대했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왜 그런 사고를 당해야 했는지, 사고후 대처는 왜 하나같이 앞 뒤가 안 맞는지, 구원파 유병언의 죽음은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정말 공적으로 책임질 사람들이 그토록 없는지...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원래 불의의 사고가 그렇듯 결코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불가사의’를 인정하더라도 세월호 사고는 성격이 다르다. 대형 참사치고는 과정의 허술함이 너무 많다. 이제 6년이면 잊을 때가 되었다고 유족과 피해자를 탓하는 건 아직은 잔인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를 가다가 등교나 하교 때 떼지어 걷는 학생들을 보면 자꾸 세월호가 엄습한다고 호소한다.

지난 주말 진도 팽목항을 다시 찾았다. 굳이 숙연해야 할 가식도 필요없기에 홀연 방문했지만 너무 황량했다.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었고 언론에 수도없이 노출돼 모든 국민들에게 익숙해진 현장들은 이젠 녹슬고 퇴색되어 안타까움만 더했다. 부디 돌아오라며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노란 리본은 해질대로 해졌고 기다림의 상징이던 주인없는 운동화도 끈이 풀어진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일까. 신기루처럼 한꺼번에 사라진 아이들의 잔상만 더 또렷하게 그려졌다. 진도국제항 개발사업으로 중장비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서도 세월호 크기만한 여객선은 무심하게도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내릴 뿐이다.

하나같이 밝은 표정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어린 학생들이 주검으로 돌아온 그 선착장에 우두커니 서서 하릴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저렇듯 큰 배가 왜 까닭도없이 급회전(변침)을 했을까, 아침 8시 30분께부터 12시까지 무려 서너시간 동안이나 배가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는데도 왜 선내 방송은 학생들에게 끝까지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위기를 못 느낄 정도로 어리석은 걸까, 선장이라는 사람은 왜 몇 시간을 멍청히 있다가 다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혼자서만 허겁지겁 탈출했을까. 이날 팽목 선착장의 찬바람은 그저 메마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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