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내이름 김일성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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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내이름 김일성을 찾았습니다”
  • 충청리뷰
  • 승인 2003.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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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설계사 김대완씨의 성공신화
고시 좌절 딛고 월수입 1천여만원 이룬 기구한 사연

어느 분야건 성공한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 생각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그 차이점이 입신(?)의 단초가 되는지도 모른다. 상가집에서 노트북을 펼쳐든다면 일반인들의 시각에선 정상이 아니다. 남들이 다 퇴근한 뒤에야 혼자 소주와 안주를 벗삼아 컴퓨터를 부팅하는 것도 범상치가 않다. 게임이나 채팅 때문이 아니라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다.
LG화재 청주지점 김대완씨(39)의 외적인 여건은 평범하다. 늦은 나이에 보험설계사로 이 회사에 들어가 동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고, 아주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굳이 남다른 면을 찾는다면 서민들로서는 쉽게 생각지 못하는 많은 돈을 번다는 사실이다. 그의 월 평균 수입은 1천만원을 웃돈다. 물론 보험 하나로 이렇게 벌어 들인다. 그가 주변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정작 관심을 끈 대목은 따로 있다. LG화재 한병수 청주지점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처음엔 헷갈렸고 지금은 존경스럽다.” 보험모집 대리인으로 시작해 지점장까지 거머쥔 한지점장 역시 도내 보험업계에선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가 김대완씨를 주목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토바이 질주로 세월 보내다
어느날 “이게 아니다”
만약 김대완씨의 삶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지금쯤은 아마 육군 장교나 고위 공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83년 청주 신흥고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충북대 연초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자꾸만 가슴에 치미는 그 무엇 때문에 1년 휴학계를 내고 육사에 도전한다. 그는 그 때의 심정을 ‘열병(熱病)’이라고 표현했다. 학교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무난하게 육사에 합격, 가입교까지 하게 된다. 그가 육사를 두드리기까지는 주변의 권유도 한몫했다. 그만큼 장래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마지막 신원조회(3차)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부친의 삼청교육대 입소전력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부친의 삼청교육대 부역은 무슨 큰 잘못때문이 아니라 당시 할당을 채우려는 당국의 마구잡이식 검거에 피해를 본 것 뿐”이라고 밝혔다. 79년 대홍수 때 침수피해를 당한 부친의 농토를 국고보조로 원상복구하는 과정에서 괜한 구설수에 오른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됐다.
육사에 떨어진 그는 방황이라는 긴 터널을 지난다. 전당포에서 싸게 구입한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지금의 폭주족 원조인 셈이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미친 듯이 돌아 다녔다”고 되뇌인다. “오토바이 기름이 떨어지면 공사판을 찾아 돈을 벌었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사정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을 1년 넘게 하다보니 어느날 ‘이게 아니다’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복학을 결심하게 됐다.”

살길 막막해 택시회사 찾아
그러나 그의 열병은 대학 3학년 때 다시 도졌다. 당시 충북대 연규횡총장이 전략적으로 출범시킨 고시반(충법헌) 1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후 행정고시 1차 합격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부인의 내조에 힘입은 10여년간의 고시 도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 갔다. 또 다시 방황이 이어졌고 당장 살길이 막막하던 그는 청주 낙원택시를 찾았다. 그야말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택시운전을 택한 것이다. 큰 걱정없이 회사 책임자와 면담까지 거쳤는데 또 신원조회(!)에서 걸렸다. 이번엔 본인의 신상이 아니라 운전면허가 문제였다. 2종면허로는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마음을 추스려 찾은 곳이 지금의 보험회사다. 당장 고시공부한다더니 고작 보험쟁이냐는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심적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침에 단단히 마음먹고 출근하지만 곧바로 체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엔 사람들을 만나도 보험이란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 때 포기했으면 지금도 뒤죽박죽일 것이다. 통상 보험인들이 겪는 공통적인 고통이지만 적응하기까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를 붙잡은 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99년 8월 입사한 그가 불과 3년여만에 연봉 1억원이 넘는 고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본인의 말대로 ‘눈물겹도록 일했다’. “상가집에서도 고객을 만나거나 전화를 받으면 노트북을 펴들었다. 밤늦게 사무실에 앉아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류를 챙길 때가 어찌보면 가장 편했던 것같다. 고객들에게 믿음을 주고 또 그 믿음이 보험계약으로 이어지는 재미는 안해 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젊은시절 대완씨의 엇박자 삶은 그의 이름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의 원래 이름은 김일성이다. 한자마저 북쪽의 그것(?)과 똑 같았다. 철이 들면서부터 줄곧 놀림을 받아 오다가 결국 중고등학교 땐 이름컴플렉스를 못이기고 몇차례 가출까지 했다. 이 때만해도 “때려잡자 김일성”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이름의 족쇄를 벗은 것은 대학 2학년 때 법원의 허가를 얻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고 부터다. 그러나 보험업을 하면서는 김일성이라는 옛 이름이 자신을 알리는데 톡톡히 기여했다. 두 이름이 나란히 적힌 명함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한테도 남다른 인상을 남겼다. 다시 ‘김일성’을 찾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 와서 그럴수는 없고 어쨌든 김일성이라는 원명(原名)이 편하게 다가 온다”고 말했다.

보험에 대한 이념 정착이 꿈
김대완씨가 법을 공부한 것도 지금에선 보험업에 큰 도움이 된다. 업무의 성격상 모든 일이 법률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법논리로 무장된 그의 설득력은 기존의 청탁이나 강요식의 보험가입을 배제한다. 좀더 전문적인 식견을 쌓기 위해 충대 법대대학원에 진학, 보험계약법을 집중 연구했다. 그의 보험관(觀 )을 듣다 보면 전문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보험은 우선 손해의 공평한 분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공정한 잣대를 적용, 능력에 따른 위험분담을 유도하는 것이 보험이다. 어찌 보면 사회공평분배의 가장 훌륭한 도구가 보험이다. 보험의 실사구시 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대완씨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이 하나 있다. 보험에 대한 이념을 확실히 정착시키는 일이다. 마지못해 가입하는 보험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가입하는 그런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가 독자적인 에이전시(Agency)를 꿈꾸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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