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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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6.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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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병 우 충청북도 교육위원
   
2006년을 풍미한 사회적 의제라면 단연코 ‘양극화’를 빼놓을 수 없겠다. 올초 국정과제로까지 언급되었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마 세계적인 현상이요 아젠다라 할 만하다.

이러한 세계적 양극화의 핵심이 소득양극화(빈부격차)요, 그것이 미국 주도의 초국적 자본이 빚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산물이라는 점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것이 경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총체적 현상이라는 점 때문에 우려가 날로 더해지고 있다.

‘의식의 양극화’도 그 중 하나다. 아니, 우리의 경우 이것은 경제의 양극화보다 더욱 심각한 측면도 있다. 경제 구조의 모순보다 더욱 깊고 질긴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이분화는 흑백논리로 대표되는 냉전식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냉전식 사고틀 안에서는 ○와 ×, 내 편과 네 편이 있을 뿐이요, 나와 ‘다른’ 존재는 ‘틀린' 존재다. 그러기에 ‘나와 다른 남’은 존중은커녕 용인할 수조차 없는 대상이다. 대화와 토론은 공연한 논란일 뿐이며 타협은 유약(?)의 산물이며 회색분자의 길이다….

이런 단세포적 이분법의 해악은 끈질기기도 하다. 다변화된 세기, ‘세계의 대통령’을 낸 시절에도 색깔컴플렉스의 위용은 무당집 깃발처럼 기세등등하게 나부끼고, 양심을 징치하는 언어테러들도 푸닥거리마냥 쟁쟁하다.

정녕 이 땅에서 ‘똘레랑스’의 기풍을 기대하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홍세화 선생이 소개해 알려진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 정신은, 그 나라 특유의 문화사적 연원을 담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라고 그리 이질적인 개념도 아니건만….

흔히들 ‘관용’ 쯤으로 풀이하는 이 말은, 실은 훨씬 더 넓은 품을 지닌 말이다. 관용이 ‘힘을 가진 이가 너그러이 받아주는’ 수직적 의미를 지닌 반면, 똘레랑스는 그보다 수평적인 개념이다.

세상의 모든 이가 제 모습, 취향, 생각, 신념, 이익 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남의 것들도 똑 같이 소중하다고 여기고 인정해 주는 태도. 내가 내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목청을 높이고 모진 싸움을 하기도 하는 것처럼, 남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것.

또, 그 과정에서 더러 내게는 무관한 불편이나 성가심이 따르더라도, 참으며 기다려 줄 수 있는 미덕. 혹은, 남들이 혹시나 ‘권리’는 없는 일을 하더라도 그것조차 그의 ‘자유’라 인정해 주는 포용력. 나아가, 상대의 생각이 나와 다를지라도 그가 그것으로 탄압 받는다면 그의 생각을 지키는 싸움에 기꺼이 함께 나설 수 있는 용기까지….

왜냐하면, 진정한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억압하는 ‘앵똘레랑스’에 대해서는 단호히 불관용, 불용인(앵똘레랑스)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똘레랑스의 품은 이처럼 넉넉하다. 하지만, 결코 우리와 거리가 먼 개념도 아니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성경 가르침이 바로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똘레랑스 자리도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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