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대한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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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대한 나의 생각
  • 충청리뷰
  • 승인 2021.04.2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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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정원을 갖고 싶다는 로망을 가졌다.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정원 가꾸기라고 해야지 마음먹은 적도 있다. 그래도 책상물림 습성은 어쩔 수 없는지 정원에 관심을 가진 후 주로 한 일은 정원에 관한 책을 사서 읽는 것이었다. 딱딱한 땅을 뒤집어 포실하게 갈아 씨를 뿌리거나, 새로 심은 모종에 물을 주고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것보다 누군가 정원을 가꾼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게 더 좋았다.

한동안 타샤 튜더의 정원,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 이분들은 동화나 소설을 쓴다는 공통점을 지녔는데, 책상에 앉아 작업할 때와는 다른 위로와 온전한 기쁨을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에서 누렸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읽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푸근해졌다. 『데미안』을 읽던 시절에는 낙엽과 마른 가지를 긁어모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헤르만 헤세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머지 시간은 놀 것』이란 책을 쓴 서화숙은 기자생활 은퇴 후 마당에 할미꽃 등 토종식물을 심고 시골 산길 같은 정원 가꾸는데 몰입했는데, ‘정원사는 무슨 꽃이 어떻게 피나 궁금해서 내일이, 내달이, 내년이 보고싶다’고, 그래서 장수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정원도 생겼다. 패션계의 전설 이브 생 로랑이 모로코 마라케시에 만든 마조렐정원을 방문해서 눈이 시리게 파란 벽 사이에 자리 잡은 선인장을 보고 싶다. 가보고픈 곳은 많지만, 갈 수 없는 요즘은 조경설계와 정원디자인을 전공한 문현주가 유럽 각국을 직접 방문해서 사진과 글로 소개한 『유럽의 주택정원』 시리즈를 읽고 또 읽고 있다.

방송작가 출신 정원디자이너 오경아도 정원의 역사에서 정원 만들기 실전에 이르기까지 책을 여러 권 펴냈다. 오경아는 속초 설악산 입구 마을에서, 문현주는 양평에서 각기 정원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원예 분야는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직업이 되었다. 여성 정원디자이너들은 정원디자인 이외에 정원학교나 화원 운영, 원예잡지 칼럼 쓰기 등으로 돈을 벌었다. 산업화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귀족의 저택뿐 아니라 중산층의 주택에도 정원 만들기가 유행한 덕도 보았다.

최초의 정원디자이너 거투르드 지킬은 미술을 전공한 후 독학으로 정원디자인을 깨우치고, 친지의 주문을 받기 시작해서 점차 사업으로 확장했다. 본격적으로 여성이 원예업에 진출한 것은 1890년대부터 원예전문대학에서 여학생을 받은 덕분이다.

정원 가꾸기는 조선 시대 선비의 취미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인연을 다룬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에는 강진 시절에 관한 설명이 소상하게 나온다. 먹을 수 있는 갖은 나물을 심은 채마밭 사이에 매화, 동백, 모란, 석류, 치자, 국화 등 형형색색 꽃나무를 섞은 다산초당 마당은 요즘으로 치면 ‘키친 가든’ 스타일이다. 궁벽한 오지에 근사하게 다듬고 가꾼 다산초당이 생기자 제자들이 하나씩 모여들어 인재 양성의 중심공간이 되었다는 설명을 보니 옳다구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추사 김정희도 마당 밖을 나설 수 없는 위리안치 유배형을 받으면서 정원에 일가견을 키웠다. 서귀포의 제주추사관 마당에는 ‘추사가 사랑했던 꽃’ 제주 수선화, 금잔옥대가 가득 심겨 있다. 말먹이로 던져지거나 잡초 취급을 받던 수선화가 추사의 눈길을 받고 해탈신선으로 호명되고 꽃으로 발견되었다. 먹을 수 있나 없나 여부로만 따진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수선화가 곱고 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정원을 좋아한다 해도 이 부동산 난국에 너른 땅을 갖고 싶다고 하면 부적절하게 보일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당 얼마냐’는 지루한 질문은 잠시 잊고 무슨 빛깔 꽃을 심을지, 산책길을 어디로 내고, 물길은 어떻게 열 것인지에 골몰하여 오롯이 나만의 정원을 가꾸고 싶다. 노동과 시간의 축적으로 아름다워진 그곳에 다정한 벗들을 초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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