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안에서 안전하지 않은 아이들
상태바
가족 안에서 안전하지 않은 아이들
  • 충청리뷰
  • 승인 2021.05.26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최선을 다한다고 항상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만일 시험이라면 다시 해볼 수 있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돌이킬 수도 없다. 보고 싶어도 다시 볼 수 없고,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갈 수 없는 시간의 벽과 마주할 뿐이다. 이렇게 했더라면 혹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살다 보면 그런 회한을 남기는 일이 가까이서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도 살랑이던 5월 22일 토요일 오후, 성안길에서 가슴 아픈 추모제가 조용히 열렸다. 국화가 놓인 제단이 있었고, 누군가 ‘지난 5월 12일, 오창에서 중학생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들은 성폭력 및 아동학대의 피해자였습니다’라는 사연이 적힌 작은 전단을 나눠주었다.

검은 마스크와 검은 티를 갖춰 입고 주위를 맴도는 남녀 중학생 또래들, 둘러앉아 하얀 습자지 종이꽃을 접고 또 접는 한 무리 조문객들, 어정쩡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거나 앉아있는 어른들이 광장에 섞여 있었다. 서로 해야 할 말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는 ‘조용하지만 작지 않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잘 닿기를, 먼저 간 그곳에서는 안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에 오롯이 집중했다.

추모의 의미가 실현되려면 잘잘못을 가려 온당한 벌을 내리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를 점검해야 한다. 바로 어른들의 몫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에서 18세 미만인 사람에게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저지르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 및 보호자의 유기, 방임 행위는 아동학대로 분류된다. 2014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가정의 훈육 방식 차이’라고 치부하던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학대행위자를 강력하게 처벌할 법이 마련됐다. 2013년 칠곡 아동학대사망사건은 법 제정의 추동력을 제공했다.

아동 인권을 다룬 『이상한 정상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칠곡사건 당시 학교, 경찰, 지방자치단체, 아동보호전문기관, 이웃 등 아이가 숨지기 전 다양한 경로로 학대 사실을 인지한 어른의 수는 모두 37명이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썼다. 그 후 올해 3월까지 아동학대처벌법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현장 조사 기능을 공공으로 전환하고, 형량을 올리고, 피해자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정을 의무화하는 등 보완을 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자기와 가장 가깝고 자신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존재인 부모가 저지르는 폭력이나 방임은 미성년자녀에게는 말할 수 없이 두려운 배반이고 공포일 것이다. 나는 그 두려움의 깊이와 어둠을 감당할 수 없어서 감히 상상하기도 싫어진다. 그럴 때면 늘 그랬듯이 책읽기로 도피한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오은영은 성숙하지 못한 부모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부모를 미워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을 다독인다. 그의 저서와 방송을 찾아 읽고 보면서 위로를 구한다. 『배움의 발견』은 미국 아이다호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7살에 처음으로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한 86년생 타라 웨스트오버가 쓴 책이다.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일상적 학대를 자신의 학업 과정을 통해 벗어나고 극복한 소녀의 성장기이다.

추모제가 열리던 바로 그 날, 워싱턴DC에서 발표된 한미정상회담(현지 시간 5월 21일) 공동선언문에는 “우리 민주국가의 힘은 여성의 최대 참여에 기반한다. 우리는 가정폭력과 온라인 착취 등을 포함한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학대를 종식시키고, 양국 모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성별 임금 격차를 좁혀나가기 위한 모범 사례를 교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소녀와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이 선언문이 든든한 뒷심이 되기를 고대한다.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