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대한 소회(所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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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대한 소회(所懷)
  • 한덕현
  • 승인 2021.06.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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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공군 여중사의 안타까운 죽음이 사회 각계에 미치는 파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당사자격인 군(軍) 뿐만 아니라 정계와 법조계 등에도 예상치 못한 파열음을 낸다. 그동안의 유사 사건과 다른 점은 이전의 성범죄가 특정 분야나 직업, 계층에 국한돼 논란을 빚었다면 이번 건은 우리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에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또 이같은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자책, 다시 말해 그동안 성범죄가 터질 때마다 사회적 공론이 수도 없이 벌어지며 엄벌과 재발방지 약속이 반복됐지만 그 것들이 모두 허위였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여기저기 상황의 위중함을 알리고 또 도움을 구했는데도 그가 굳게 믿었던 대한민국 사회의 제도와 룰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를 넘어 극도의 적개심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도 전혀 검증되지 않은 대권주자들이 ‘국민’을 입에 올리며 마치 자신만이 나라를 위할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는 사람들이 많다.

숨진 여중사와 관련된 논란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유독 눈길이 간 것은 유족들이 공군 법무실 소속 국선변호사를 직무유기등 혐의로 고소했다는 내용이다. 여중사가 성추행 피해를 정식 신고한 이후 지정된 국선변호사가 피해자 사망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면담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국선변호사가 직무유기로 피소된 사례가 있었는지가 우선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인의 입장에선 돈도 안받고 자신을 변호해주는 국선변호사는 그저 고마운 존재다.

문제는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국선변호사의 역할이 말 그대로 나라가 선정한 취지대로 이루어지느냐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도 국선변호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다. 기사 특히 비판기사를 쓰다보면 보면 취재원으로부터 소송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언론사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종 종 국선변호사를 원하게 되는데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공판에 나온 변호인이 정작 내 사건이 뭔지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재판에 임했다가 판사에게 지적을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그는 사전면담 요구에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법정에 나왔다. 할 수 없이 며칠 후 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지만 얼마나 냉대하던지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언론종사자들한테도 이러니 다른 사람들에겐 어떻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할 말은 아니지만 얼마 후 그가 지병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참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국선변호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법원이 무작위로 순번을 정해 선정하는 일반 국선변호사는 통상 한 건당 국가로부터 30만~40만원의 수임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재판을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말이 한 건이지 사안에 따라선 몇 차례, 수차례 공판을 진행하게 돼 국선변호인의 입장에선 울며 겨자먹기로 벌이가 안 되는 일에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법원에 채용되어 급여를 받는 국선 전담변호사라고 해도 대우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변호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 어려움이 많다.

그렇더라도 형사사건이든 민사사건이든 수사와 소송에 임하는 사람들이 변호사에게 의지하려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변호사의 태도와 말 한 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변호사가 자기 사건에 대해 진심을 다한다고 느껴지면 마냥 믿음이 가지만 반대로 건성으로 임한다고 생각되면 밤잠까지 설치게 된다. 변호사의 긍정적인 말 한 마디에 세상이 열리는 것같은 기분을 느끼다가도 부정적인 단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경험한다. 의뢰인에게 변호사의 조력은 이처럼 절대적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법(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체질이 자유로움을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경험칙상 법의 궁극적인 목표인 ‘사회정의’가 현실과는 괴리가 큼을 늘 느끼며 사는 게 더 큰 이유일 수 있다. 그동안 여러 쟁송에 휩싸이면서 유전무죄와 무전유죄를 겪었다면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기에 법보다 상식, 법 위에 상식을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려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온통 법 만능주의에 빠진 것같아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를 정치권이 가장 앞장서 충돌질하고 있다. 자기들끼리의 정쟁까지도 툭하면 고소고발과 소송으로 끌고 가며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 그 압권이 지난 ‘윤석열 사태’ 때다. 대통령의 임명직인 검찰총장 지위를 놓고 사사건건 소송으로 맞서는 바람에 대통령의 국가통치권마저도 일개 판사에게 휘둘리는 상황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인사권자로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대통령도 무책임하지만 국회의원들이 입법기관의 책무를 방기한 채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쪼르르 검찰과 법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대한민국=민주주의’라는 등식이 그렇게 모순되고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법의 민주화와 사법개혁을 외치고 있다. 나는 이를 간단하게 생각한다. 헌법과 법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적’이고 ‘상식적’이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아무리 민주화 과정을 거쳤더라도 법은 흔들림없이 권위적이다. 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법이 물리적으로는 너무 위압적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 원고와 피고 사이의 공방과 논쟁이 피를 튀기지만 현실은 안 그렇다. 법정에서 말 한 마디 잘못 거들었다가는 판사에게 괘씸죄로 찍혀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다. 조국이 ‘조국을 시간’을 내어 자기할말을 다하려는 저의를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일견 이해가 된다.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내 사건에 나의 반 만큼이라도 애착을 가질 것이라고 믿는 건 큰 사건이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착각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법대로~와 그들이 생각하는 법대로~는 그만큼 간극이 크다. 그들이 많은 사건에 가위눌림을 당하고 또 시간에 쫓김을 이해하더라도 법은 이래서 인간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사람에겐 생사가 걸린 사건도 그들에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잡범’으로 취급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이 나만의 편견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 역시 법의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람 둘만 모여도 거기엔 반드시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는 데엔 실정법 이상의 잣대가 없다고 본다. 아무리 상식도 그것을 이해에 민첩한 인간이 다룬다면 법보다도 훨씬 더 편의적으로 운용될 소지가 있다. 그렇더라도 법 종사자들이 없는 죄도 만들고 있는 죄도 없앤다는 ‘법기술자’라는 오명을 불식시킬 때까지는 나의 ‘법보다 상식, 법 위에 상식’이라는 신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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