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와 우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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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와 우상화
  • 한덕현
  • 승인 2021.06.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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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윤석열의 대권도전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보도에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은 막상 그가 검찰을 떠나면 과연 어떤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이다. 정글로 표현되는 정치판에선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동(推動)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선 자신을 던져 이른바 자가발전도 잘 구사해야 살아남기에 그가 이에 적응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윤석열이 권력에 눈치 안보고 사람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공정의 이미지를 얻게 되기까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잘 만들어지고 또 법률로써 신분과 권한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검찰을 떠나 자연인이 되었을 때의 윤석열로선 당연히 이제까지 수사권과 기소권을 무기로 행사하던 막강한 ‘힘’의 위축은 불가피할 것이고 결국 향후 대권 가도 역시 철저하게 본인의 역량에 달려 있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기준하면 큰 점수를 못 주겠다. 최근 여론처럼 그에 대한 기대감도 떨어진다. 검찰이라는 외피를 벗은 그에게서 현역 시절의 과단성이나 용맹함은 찾지 못하겠다. 정치에서 가장 치열한 투쟁력이 요구되는 것이 대선인데도 벌써 몇 달 째 측근과 지인을 내세워 공자님 말씀이나 흘리며 전언정치를 하는 운신도 식상하고, 적어도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여론에만 의존해 행보를 이어가는 처사가 영 불편하다. 꼭 간보기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그의 비전과 소신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가 목을 조여오고 있는 문제의 X파일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미지수다.

언론의 입장에서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개인적으로 늘 강조했던 것이 하나 있다. 특정인에 대한 우상화의 경계다. 역대 대통령의 말년이 상징하듯 우리나라 대통령 문화가 왜곡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는 바로 선거 때마다 독버섯처럼 살아나는 ‘우상화 악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실체보다는 잘 만들어진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저 맹목적으로 후보를 과대평가하고 결국 이에 근거해 인물을 선택했다가 후회하는 악순환을 반복한 것이다. 그들이 국가의 지도자감으로서 어떤 자질을 갖췄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름 석자에 환호하고 집착했다.

지금 감옥에 있는 이명박과 박근혜만 봐도 그렇다. 현대그룹을 일군 이명박은 “모든 국민들을 잘 살게 해준다”는 기대감으로, 수첩 공주 박근혜는 마치 여신의 강림에 버금가는 이미지로 우상화의 대상이 되었지만 결과는 모두 허상이었다. 이들이 대선 때 여론몰이가 아닌 제대로 된 검증만 거쳤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우상화로 만들어진 왜곡된 신화는 진실을 가리고 현상을 굴절시켜 끝내는 문명의 후퇴를 가져왔다.

물론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탄생하기 위해선 특정인을 향한 대중의 환호와 지지는 불가피하다. 선거는 후보와 유권자가 합작하여 만들어내는 종합 예술이라는 말도 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전지전능의(almighty) 역량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대통령 리더십은 그냥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윤석열이 수사를 잘했다고 해서, 그리고 최재형이 감사 한 번 똑소리나게 했다고 해서 대통령 꿈을 꾼다면 선진 민주국가는 고사하고 누가 이런 나라를 정상적으로 평가하겠는가. 지금의 형국이 꼭 이런 꼴이다. 순간의 지명도가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보증할 수는 없다. 자고 나면 대권후보들이 여기저기 돌출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염치와 정도가 없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다. 국민들을 너무 우습게 본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사진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그가 쓴 ‘미국의 민주주의’
사진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그가 쓴 ‘미국의 민주주의’

 

이승만 이후 그래도(?) 성공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DJ가 될 것이다. IMF외환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북한과의 관계에선 극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국내 정치에서도 화해와 화합의 싹을 틔워 결국 노벨상까지 받았다. 한데 DJ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가장 험난한 정치역정을 걸어왔고 권력으로부터의 핍박과 압제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살아온 과정과 경험이 포괄적이면서도 치열해야 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식견과 판단이 가능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내공을 겸비해야 실패없이 대통령의 성공신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한데 냉정하게 따지면 DJ 외엔 나머지 대통령들은 단 기간의 우상화에 의지해 권좌에 올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존재감이 없는 윤보선(4대)과 최규하(10대)를 빼곤 말이다. 단순히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 맞섰다고 해서 국가리더십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믿고 키워준 주군에게 배신의 딱지를 돋보이게 할 뿐이다.

1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으로 통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끝내 가장 강조한 것은 시민들의 깨어있는 각성과 성찰이다. 그가 26세의 팔팔한 나이에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목격한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유럽의 절대 왕정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선거라는 제도로 누구나 정치를 하고 또 권력을 창출하는 미국은 한 마디로 유토피아, 신세계였다. 미국사회의 정치 시스템에 감격한 나머지 프랑스로 돌아가 이 책을 써 잠자던 유럽을 일깨웠지만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약점도 함께 적시해 일탈을 경계했다.

그중 하나가 ‘다수의 횡포’다. 그는 다수의 지지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는 독재적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절대 왕정처럼 강압적 권력은 아니더라도 소수의 이익이나 목소리를 차단해 버리는 폭정의 단초가 된다고 내다본 것이다. 시민들은 안정감을 가지지만 반대로 정치에는 점차 무관심해지면서 이를 정부가 악용할 경우 폭력적이 되는 것을 토크빌은 미국에서 성찰했다. 이때 이미 나치와 히틀러의 탄생을 예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을 꼬드겨 세기적인 독재를 실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그 것의 주인인 시민과 대중의 역할이 방기될 땐 반드시 역기능이 드러남을 간파한 토크빌은 그래서 민주주의에 관한 만고불변의 금언을 하나 만들어 낸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그렇다면 서로 대통령을 하겠다면서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작금의 현실에선 결국 국민들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그 수준의 후보에게 장단을 맞추고, 자칫하면 그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지하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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