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민족을 학살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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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민족을 학살한 사람들
  • 한덕현
  • 승인 2021.07.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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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이번에도 여지없이 색깔론이 등장했다. 이재명의 ‘미국 점령군’ 발언이 단초를 제공한 꼴이 되었지만 진영으로 갈려 열을 올리는 정치인과 언론의 최근 공방을 보면 어차피 이 문제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대선 기간 내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선거는 흔들림없이 색깔론에 휘둘렸고 이로인해 국가운영에도 많은 역기능을 초래했다. 오죽하면 대통령 후보들은 색깔론에 살고 색깔론에 죽는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문제의 색깔론을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 모두 과거에 비해 말과 표현을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으로, 정치권에선 캐스팅 보트를 쥔 중도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안 그렇다. 국민들이 더 이상 이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다. 갑자기 정치세력의 핵으로 등장한 2030이나 MZ세대들이 이념보다는 자기 삶에 중심추를 둔다는 것도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들에게 과거의 ‘빨갱이 타령’이나 흑백논리는 상종하기도 싫은 꼰대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그렇더라도 차제에 이재명 발언을 계기로 불거진 ‘미국이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이승만은 과연 국부인가’ ‘친일문제는?’ 등의 화두는 한 번쯤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물음에 대해 굳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답은 이렇다. 물론 근자에 여야가 서로 삿대질하듯, 미천한 역사인식이나 이념의 편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단순하게 말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점령군도 될 수 있고 해방군도 될 수 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 될지언정 절대로 국부가 아니고 친일문제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이제 재정립을 해야 할 때라고 본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수립 단계와는 좀 달리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체제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는 이재명의 말은 맞다. 이를 가지고 이제 와서 미국이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공방을 벌이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미국이 일제 식민지를 종식시키고 한반도 독립을 주창하며 남한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 번영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군이다.

하지만 당시 핵폭탄 한 방에 무조건 항복한 일본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출한 미국과 소련의 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점령군 지위였다. 그러다가 1946년 3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활동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결렬되자 두 강대국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 지배에 꽂혔고 이런 내성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방문에서야 비로소 중장거리 미사일이 풀렸으나 전시작전권 환수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것 등은 사실 양국관계의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미국은 늘 자국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 우리나라를 관리해 왔고 그 기저에는 자신들이 점령군이었다는 시각으로 고착된 우월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광주학살도 묵인했고 전두환의 쿠데타도 인정했다. 우리가 아무리 민족자강과 자주국방을 외쳐도 미국은 코웃음을 친다. 점령군이라는 단어에 속이 불편하다면 지금 당장 이태원이나 동두천, 평택 등을 가보길 바란다. 분명 대한민국인데 실제로는 곳곳에서 미국을 느낀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재명의 말은 누가 말했듯 토씨 하나 안 틀리는 팩트이고 때문에 우리 민족에겐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되고 있다.

국부(國父)의 사전적 의미는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운 ‘나라의 아버지’이다. 이승만에 관해서는 독립운동 이력이나 건국 과정의 역할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국부라고 추앙하기엔 결격사유가 너무 크다. 다름아닌 국민 학살이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1개 국가 체제에서의 자국민 학살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반대편이라고 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승만 체제에서의 자국민 살육은 대충만 꼽아도 상상을 초월한다. 보도연맹사건 20만명, 제주4.3사건 1만4000여명(당시 제주도민의 8분의 1), 국민방위군사건 10만여명, 거창민간인학살 500여명, 세기의 학살자라는 히틀러도 자기 국민에게는 이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한강을 건너가 피신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예고없이 폭파시켜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던 서울시민 500여명(추정)을 한꺼번에 수장시킨 만행은 아무리 상황의 화급함을 인정하더라도 도저히 국가 지도자의 결단이라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 문제는 그가 직접 명령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서울사수!를 외치다가 슬그머니 한강다리를 넘어 스스로가 피난길에 오른 처지에서 자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에 배신감이 더 크다. 나라의 아버지라면 이럴 수는 없다. 이승만에 대한 국부논쟁도 이젠 그칠 때가 됐다.

해방 이후 8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친일문제는 여전히 국가적 난제중에 난제다. 친일세력들이 점령군 미국과 야합해 기형의 독립국가를 출범시킨 업보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해방군이었다면 맥아더는 친일분자들에게 구세주가 된 셈이다. 문제는 친일분자의 3세들까지 이제 장년이나 황혼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고 또 언제까지 국가와 사회운영에 있어 친일의 공방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도 친일만 들고 나오면 사람들은 딱 갈린다.

유럽 사회가 지금까지도 전범을 좇아 처결하듯 친일로써 부와 명예를 누린 당사자는 죽어서라도 응징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그 본질이 왜곡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명분에만 치우치다 보니 친일문제가 과잉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선대가 일제의 직함을 가졌다고 해서 후세들이 일방적으로 폄훼되고 또 이를 정치권이 전략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나라의 의제가 너무 ‘과거’에만 얽매인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친일문제가 더 이상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데 악용되면 안 된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정작 우려되는 것은 동북공정도 부족해 이젠 김치와 한복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억지를 펴며 한국을 속국 쯤으로 치부하려는 중국과, 사사건건 우리나라에 침략의 근성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일본의 행태다. 이 곳 지도자들 인식에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조공을 바치는 나라, 신민지배를 했던 나라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다시 지지 않으려면 혈맹인 미국을 놓고 한가하게 해방군이니 점령군이니를 따질 때가 아니다. 요즘 시진핑과 스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두려움(?)과 함께 구역질이 나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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