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관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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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관 신규식
  • 한덕현
  • 승인 2021.09.0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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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이 순국 78년만에야 고국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에 관한 이념 논란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한때 구 소련군과 손을 잡았고 1927년엔 공산당인 볼셰비키당에 입당하는 등 사회주의에 접근했다는 것이 빌미가 돼 초대 이승만 정권부터 이제껏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실제로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홍범도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거나 설령 언급되더라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말년엔 쓸쓸히 죽었다' 식으로 부정적이었다. 뒤늦게 범국가적 예우를 받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됐지만 보수언론의 어깃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이들의 홍범도 폄훼는 지금도 종종 사석에서 출몰한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사정은 더 계략적이다. 해방후 친일파가 청산되기는커녕 되레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홍범도 같은 인물을 잘못(?) 조명했다가는 좁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기게 되고 넓게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홍범도의 귀환은 독립운동사를 바로 잡는 특단의 계기가 되고 바로 이런 것이 역사바로세우기의 핵심 요체라 할 수 있다.

홍범도 못지 않게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스스로의 업적에 걸맞는 기림과 추모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 또 있다. 물론 교과서등을 통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비중있게 다뤄지지만 실체에 접근하기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예관 신규식이다. 우리로서는 그가 청주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특히 주목된다. 우선 그의 아호인 예관 부터가 범상치 않다. 말 그대로 사물을 삐딱하게 흘겨본다는 뜻으로, 여기엔 그의 아픈 상처가 서려 있다.

그는 대한제국 무관으로 재직중이던 1905년 나라가 을사늑약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이 때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게 됐고 후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나서는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겠냐며 일본놈을 꼬나보면서 대신 한쪽 눈으로만 독립광명의 미래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 강직함이야 일제에 굽히기 싫어 세수할 때도 꼿꼿이 서서 했다는 같은 고령 신()씨 단재 신채호를 연상시킨다. 임시정부에 내분이 생기자 신규식이 25일 단식으로 43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짙은 색안경을 끼고 대중앞에 나타난 이유다.

며칠전 한 지인의 제보로 청주 수암골 초입의 우암산 산자락을 방문하고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술한 맨땅에 커다란 현수막들이 걸려있고 한쪽에 덜렁 놓인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신규식과 관련된 각종 사료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 곳을 지키는 신환우씨는 역시 고령 신씨 문중으로 자신을 대한민국건국회 동제사회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꿰뚫고 있었는데 모든 게 신규식 때문이라고 했다. 후손으로서 이젠 신규식의 삶을 제대로 정립해야 하고 더 나아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독립운동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신념 하나로 이 일을 한다고 했다.

동제사(同濟社)는 신규식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1912520일 설립한 비밀결사체로 한국과 미국, 유럽, 러시아, 일본 등에도 지부를 둘 정도로 방대한 국제적 조직이었다. 동제사는 신규식 독립운동의 모든 걸 대표한다고 할 정도로 당시 독립운동의 최고 산실이었다. 동제사를 기반으로 191312월 상하이에 설립된 박달학원(博達學院)은 독립운동의 확대와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교수진으로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ㆍ신채호ㆍ김규식ㆍ조소앙ㆍ홍명희ㆍ조성환 등이 포진한 것을 봐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동제사가 19177월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문으로 2년후 3.1독립선언서의 모체가 됐다. 1919411일 설립된 상해임시정부도 동제사와, 동제사를 통한 인맥으로 형성된 중국 거목들의 도움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것처럼 임시정부의 아버지는 김구나 이승만이 아니라 신규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들의 당초 활동에 근거와 무대를 제시해 준 것이 동제사이기 때문이다. 동제사는 멸망한 조선을 대신해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 명실상부한 국가의 역할을 했다. 동제사 비밀요원인 여운형이 1918년 한민족 최초의 정치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한 것도 흥미롭다. 신한청년당은 후에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산파역할을 한다.

근자에 이러한 신규식을 심층 재조명한 이가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2005EBS 기획으로 해방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규식의 면모를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는 다시 쓰여져야 하고 그 단초가 신규식이라고 했다. 신규식이 독립운동의 모든 물줄기를 이루는 거인이자 좌우합작의 비전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이승만에 의해 뭉개져버리고 이를 시발로 독립운동사의 많은 부분이 친일의 유산들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신규식이 생전 드러내기를 꺼린 탓도 있겠지만 그가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건 홍범도 사례와 다를 바 없다. 당장 충북지역의 사정만 봐도 그렇다. 단재 신채호에 대해선 거도적인 차원의 기념사업이 연례 행사로 치러지고 있지만 신규식에 대해선 변변한 추모의 계기가 없다. 가문으로 치면 신채호는 신규식의 친족 조카뻘이다. 실제로 둘은 항렬(行列)에 의한 위, 아래 관계로 많은 활동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5년 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서도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관련해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최재형의 활약상 때문이다.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가 허구라는 자책마저 들었다. 이 곳 극동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와 중국 내 항일투쟁은 최재형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될 정도로 그의 역할과 위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모든 자금과 편의제공이 당시 갑부였던 최재형으로부터 나왔고 스스로도 몸을 던져 그 투쟁의 전면에 섰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안중근의 단지(斷指)도 최재형의 집 창고에서 감행됐다. 19093월 초 항일투사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암살계획을 세우고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大韓獨立이라고 혈서를 쓴 것이다.

이러한 최재형 이었지만 1990년 한·러수교로 러시아와 교류가 이뤄지기까지는 그의 얘기는 역사학자들조차 잘 알지 못했다. 최근에야 보훈처가 나서 최재형이 살던 집을 매입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고 그 후손을 초청했어도 최재형에 대한 선양(宣揚)은 아직도 형편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선에 출마하면서 조부의 독립운동 이력을 작위적으로 제시해 논란을 빚은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한자(崔在亨) 까지 똑같은 것도 참 아니러니컬하다. 하지만 과거의 최재형과 현재의 최재형이 시사하는 건 역사의 왜곡이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홍범도 장군처럼 사후 71년이 되어서야 1993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된 신규식은 내년에 순국 100주년, 그리고 그가 만든 독립운동의 요람 동제사는 설립 110주년을 맞는다. 역사에 기록된 온갖 활동을 벌이면서도 결코 공명을 바라지 않았던 신규식이었다지만 김용옥의 장탄식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은폐·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하에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한쪽 눈만 뜨고 우리를 째려보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우선 자치단체 차원에서라도 신규식 재조명에 나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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