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시대
상태바
오징어 시대
  • 한덕현
  • 승인 2021.09.29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래도 반갑다. 조만간 곽상도의 얼굴을 언론에서 안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가 현 정부,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저격수로 활동하는 걸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그 표정과 이미지가 나로선 늘 불편했다. 과거 검사 시절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를 볼 때마다 검찰에 대한 음습한 편견이 자꾸 되살아나는 것같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겠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지금의 기대감이 착각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다시 특유의 희한한(?) 논리로 대중앞에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마저 든다. 이미 아들이 받은 천문학적 돈에 대해 처음엔 퇴직금이라고 했다가 다시 성과급으로, 이 것도 안 통하자 산재위로금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법기술자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로자가 일하다가 죽어야 받는 산재보상금은 많아봤자 1, 2억원 정도다.

서른 한 살의 대리 직급이 5년여 근무에 퇴직금으로 50억원을 받았다. 이런 뉴스를 삭이기도 어려운 판에 당사자인 아들의 해명은 더 놀랍다.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게임 속 ''일 뿐이다. 제가 입사한 시점에 '화천대유'는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 그들의 눈에 국민은 말이 아니라 개, 돼지로 보이는 것같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게임속의 일개 에 불과한 그가 50억원을 챙겼으니 그 게임을 설계하고 세팅한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꿀꺽했을까. 굳이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렇듯 게걸스럽게 흡입하지 않고서는 상상이 안되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나같이 인생 낙오자들이다. 각자 신체포기 각서를 쓰고 456억원이 걸린 서바이벌에 참가한 이들은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존재들로 해고노동자, 탈북자, 이주노동자, 가난한 수재, 사기꾼, 조직폭력배, 친족 성폭력 피해자 등으로 묘사됐다. 실제로 게임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선택은 단호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다.

곽상도의 아들이 이런 존재들인 말()에 자신을 비유했다는 것도 참 경외롭다. 사업디자인(대학)과 스포츠산업(대학원)을 공부했다는 그가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화천대유에서 보상업무를 맡은 건 부모찬스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퇴직금으로 50억원까지 받았으니 그는 오징어게임의 말,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그 말들을 좌절시키고 분노케하는 우리나라 특권층, 금수저라고 해야 맞다

매일 매일 상황이 달라지고 있지만 앞으로 국민들은 화천대유가 연출할 게임에 정신줄을 놓칠 수도 있다. 곽상도 아들의 말처럼 오징어 게임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세팅한 숨은 자들이 조금씩 드러날 테고 이럴 때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지쳐 있는 국민들의 가슴은 더 찢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나도는 말이 이제 우리나라는 오징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이 일그러진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 드러난 박영수 권순일 김수남 이경재 강찬우 등 법조인은 약과일 수 있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조차 거론된 대한민국은 판검사 공화국” “판검사 다 썩었다정도가 아니라 국가가치관에 그 이상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무슨 일이 또 터질지도 모른다. 일개 직원이 평생도 아닌 5년 근무에 50억원의 퇴직금을 받고 나라의 공직을 대표한다는 이들이 줄줄이 엮여 있으니 하는 말이다. 마치 들판에서 역한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쇠파리떼를 보는 것같다. 돈 냄새 말이다.

곽상도 의원 / 뉴시스
곽상도 의원 / 뉴시스

 

사실 오징어 시대라는 말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하던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돈스러울 때마다 이런 현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워딩(wording)은 적시에 출현했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주창한 아노미(anomie)를 우선 들 수 있다. 아노미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대변하며 인류사에 아노미 시대라는 말을 오랫동안 남기게 된다. 굳게 믿었던 공동체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목적의식이나 이상이 상실됨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대중들에게 온갖 선()을 주창하던 높으신분들의 부끄러운 이면이 속속 드러나는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결코 이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 2012년엔 멘붕의 시대라는 말이 히트를 쳤다. 당시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들 사이의 신조어인 '멘붕'이 졸지에 유행어로 전이된 것이다. '멘탈 붕괴'를 뜻하는 이 말을 몇몇 정치인들이 20124·11 총선의 결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결정적 발단이 됐다. 무조건 이길 줄로만 알았던 당시 야당 지지자들이 여당인 새누리당 압승으로 결론나자 이를 자책하며 그 좌절감을 삭이는데 동원한 단어로 지금도 곧잘 인용된다. 말 그대로 당혹스러운 일을 당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이나 행동을 보이는 것 쯤으로 해석됐다. '정신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국민들의 심정은 곽상도 아들의 50억 퇴직금 소식에서도 똑같이 느껴진다.

각종 요리감으로 애용되며 인간에게 친숙한 오징어는 역설적이게도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못생긴 상대를 놀릴 때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코메디언 백남봉은 생전에 아예 불에 달궈지는 오징어를 표정으로 연기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극단의 서바이벌게임을 오징어게임이라고 했을까? 빨판과 날카로운 입으로 작은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 오징어는 짝짓기를 시도할 때 반짝거리는 신호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암컷이 주도적으로 수컷의 정자를 받아들이며 혼신의 짝짓기를 한 후에 서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이 있다면 이번 화천대유 사건, 그리고 곽상도 아들의 50억원 추문이 우리나라의 부동산 망령, 아파트와 땅이 부정축재의 최고 수단으로 끊임없이 악용되는 국가문화를 사장시키는 특단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할 일을 다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 오징어처럼 말이다. 의혹에 휘말렸던 이재명은 물론이고 다른 후보들도 차제에 이런 의지를 밝히고 있으니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발 국민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오징어 시대가 빨리 끝나지 않겠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