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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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품격
  • 한덕현
  • 승인 2021.10.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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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지도자가 16년이나 장기집권을 했다면 결과는 어떨까. 민주국가는 고사하고 독재체제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있더라도 그 당사자는 십중팔구 끝이 사납거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그럴 운명에 처할 공산이 클 것이다. 이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상식이고 실제로 많은 사례를 경험했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그토록 오래도록 집권했는데도 오히려 퇴임을 앞두고 세계언론이 그를 추켜세우느라 호들갑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 얘기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그가 지난 3일 대중앞에서 한 통일 31주년 기념연설이 국내에서도 여러 언론에 소개됐다. 이를 읽거나 들으면서 참 묘한 기분을 느꼈던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한마디 한마디가 현재 난장판처럼 돌아가는 우리나라 대통령선거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을 음미할 때마다 공감이 절로 나다가도 곧바로 우리의 현실에 얼굴이 화끈거림을 숨기지 못했다. 다름아닌 수치감이다.

학술적으로 규명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일은 오래전부터 한국과 많은 부분에 있어 국가, 국민적 정서가 유사하다는 평을 받아온 나라다. 유럽국가중에서도 소설등 문학작품이 일찌감치 국내에 소개되어 익숙한 것도 독일이고, 꼭 티를 내지 않더라도 모든 분야의 상호 교류가 흔들림없이 유지되는 게 두 나라 관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제결혼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는 나라가 독일이라고 한다. 분단의 아픔 역시 두 나라만의 공통점이다.

그래서일까. “독일 통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큰 화두를 던지면서 포문을 연 이날 메르켈의 기념연설은 그 것을 그대로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몇 가지만 추리면 이렇다.

서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사람들과의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살아온 길과 경험을 존중해야 하며 이 것이 통일 31주년의 교훈이다.” “조국이란 무엇이냐.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견이 경청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극단주의가 민주주의는 물론 시민들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공공연한 거짓말과 가짜 정보가 나돌고 적개심과 증오가 부추겨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사회적 유대가 시험대에 올랐다. 민주주의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매일 함께 노력해야 한다.”

통일된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한 동서간의 격차, 즉 과거 동독지역의 경제·문화적 낙후를 걱정하면서도 나치 추종자등 극우세력들이 활개치는 이념갈등의 폐해를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지만 메르켈의 리더십은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 타협, 인내, 합의, 관용 등으로 상징된다. 그에 대해 정치의 진수, 국가리더십의 진수라는 수식어가 달리는 것도 이에 근거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 / 뉴시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 / 뉴시스

 

사실 메르켈의 관리능력은 이런 데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상황에서의 유럽 부채, 중동 분쟁에 따른 난민 문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의 세계질서 혼란 등 메르켈 재임 동안 부딪힌 난제들은 하나같이 극도의 위기감으로 엄습했지만 그는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독일과 유럽을 이끌며 안정과 번영을 지켜냈다. 어느덧 세계 지도자들은 막상 메르켈이 떠나면 가뜩이나 갈라지고 있는 유럽은 어디로 갈 것 인가를 고민할 지경이 됐다.

이러한 메르켈이지만 우리에게 그의 이미지는 평범하고도 털털한, 영락없는 아줌마 상이다.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서 직접 식료품을 구입하고 같은 옷을 10년 넘게 입고 다닌다. 한 기자가 항상 같은 옷만 입는데 다른 옷은 없냐고 묻자 메르켈은 나는 모델이 아니라 공무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총리가 되기 전에 살던 아파트에 그대로 살면서 집안 일도 남편과 나눠서 직접 하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고집했다. 독일인들도 그에게 무티(Mutti:엄마)’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마치 이웃처럼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때로는 강인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엄마 같은 리더십을 발휘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통했다. 이단아 트럼프와 담판을 지을 때도 그의 당당함은 세계인의 눈을 즐겁게 했다. 공교롭게도 지금, 메르켈은 떠나려는 순간에도 국민지지도가 60%를 넘고 있지만 다시 정치재기를 꿈꾸는 트럼프는 언론에 노출되기만 하면 온갖 비난을 받느라 바쁘다. 국회의사당 폭동으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을 민주주의 후진국가로 추락시킨 트럼프의 언행은 여전히 천박하다.

메르켈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은 우리도 저런 지도자를 갖고 싶다는 자조섞인 한탄이다. 메르켈은 소위 말하는 포퓰리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펴서 장수한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신념으로 뚜벅뚜벅 제 할 일을 했기에 오늘의 영광을 얻게 됐다. 특히 경제와 외교등에서 빛나는 성과를 냄으로써 독일이 다시 유럽의 맹주가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메르켈을 얘기하면서 우리나라 대선판을 생각한다. 그런데 한숨부터 나온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메르켈같은 대통령은커녕 근처에도 갈수 없는 형편없는 대통령이 나올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후보라는 사람들의 배신과 막말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겠다. 살다보면 이런 상황은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문제는 그들, 여론 지지도에서 앞서는 후보들의 면면이 날이 갈수록 참으로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후보토론회를 지켜보면 아는 것도 얄팍하고 그들이 워낙 평생을 온실속에서 대접만 받고 자라서인지 보편적 삶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도 미천하기만 하다. 그러니 손바닥에 왕()자나 그리고, 드러나는 의혹에 대해선 계속 말 바꾸기로 위기를 넘기려 한다. 자칫하다간 어? 하다가 대통령이 되는 그야말로 급조된 대통령을 맞이할 수도 있다.

지금 국민들이 환호하고 관심을 갖는 건 후보들의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다. 대신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상대를 향해 입에 거품을 무는 저주와 혐오 뿐이다. 후보들의 수준이 이러니 국민들의 정치담론도 자꾸 저급해지는 것같아 걱정된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시중에선 말도 안되는 후보들에게 환호작약하는 국민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푸념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잘못 하다간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In every democracy, the people get the government they deserve)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Every nation gets the government it deserves)”라는 19세기 유럽사회의 경고가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에서 비로소(?)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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