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도심 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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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도심 산보
  • 충청리뷰
  • 승인 2021.10.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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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뜸을 들이며 왔건만 인사도 없이 냉큼 가버릴 것 같은 계절, 가을이다. 무엇을 하든 안 하든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어느덧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가을 햇살을 핑계 삼아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동한다. 게으른 나는 산에 오르는 대신 익숙한 동네를 여행자처럼 이동하며 구경한다. 충북도청 주변은 재미난 여행지로 변한다. 대부분 광역 지방정부의 청사는 신도시로 이전했기 때문에 이제 구도심에 남아있는 청사는 귀하다.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이남희 충북도 여성가족정책관

도청 건너편 성안길은 예전에 본정통이라고 불렀다. 서울 충무로가 그랬듯이 일제시대부터 번화가였다는 흔적이다. 나는 태어나서 청소년기까지 십수 년을 성안길 반경 1킬로미터 안에서 살았다. 그래도 어릴 때는 학교를 오가는 길이 꽤 멀게만 느껴졌다. 단체관람을 가던 청주극장, 동아극장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우동과 호떡, 비빔냉면과 햄버거의 맛은 여전하다. 가끔 혼자 점심 먹는 날 번갈아 들른다. 중앙공원을 가로질러 가서 특별한 날에나 맛보던 튀긴 통닭 두 마리를 한 번에 사갈 때면 난 진심 성공한 어른이 된 기분이 든다.

가정 시간에 필요한 수예 준비물을 사던 옛 수아사 자리를 지나 청소년광장 쪽으로 가면 개성 있는 크고 작은 식당과 카페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갈만한 식당이 많은 동네가 살만한 곳이라고 늘 생각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여전히 정성스럽게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을 보면 참 고맙고, 닫힌 문을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그 와중에 저편에 50년 전통 모밀집 간판이 보인다. 문득 내가 그 집의 초창기를 기억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흥얼거리며 얼른 지나갔다.

향교 방향으로 올라가면 청주 향리단길답게 괜찮은 카페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이 길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에는 향교뿐 아니라 지금은 충북문화관이 된 옛 지사관사도 있다. 적산가옥과 이층 양옥, 잘 가꾼 정원이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마침 10월 동안 안승각, 안영일 부자 화가의 예술과 삶을 조명한 거장의 귀환전시가 열렸다. 눈 밝은 큐레이터 덕분에 두 거장의 작품을 만나고 괜히 내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도심의 산책은 근대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우리나라 양갓집 부부가 함께 혹은 여염집 여성이 혼자 도심의 거리를 걷고 구경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1920~30년대에 들어와 모던보이, 모던걸은 도쿄나 파리, 런던을 동경하며 경성 거리를 일삼아 산보하고 다녔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이들을 겉멋 든 한심한 부류로 비판하는 시각도 있었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에서 식민지의 무력한 지식인의 일상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을 동시에 표현했다.

산책이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갖는 행위였나 싶기도 하지만, 도시를 산책할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남자였다. 현대에도 여성은 도시 환경에 따라 폭력적 시선에 노출되기도 하고, 걸으면서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산책자로 번역하는 플라뇌르도시를 경험하기 위해 도시를 걸어다니는 자라는 의미이다. 보들레르에서 비롯되어 벤야민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 리베카 솔릿의 걷기의 인문학등은 남성명사인 플라뇌르대신 플라뇌즈라는 여성명사를 사용하면서 여성의 산보를 지성사 맥락에서 새로이 해석했다.

주말에는 도민에게 도청 주차장과 정원을 개방한다. 일직을 해보니 본관 현관 앞에 와서 화장실을 찾는 나들이객이 꽤 많았다. 세종이나 진천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성안길에 놀러 온 가족도 더러 있었다. 누구라도 가을의 도심 산보를 통해 코로나19 시기의 피로감을 풀고 즐거운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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