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연 파문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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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연 파문이 남긴 것
  • 한덕현
  • 승인 2021.12.0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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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멀었다. 조동연 논란을 지켜보며 다시 한 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정치입문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이치와 도리의 발로, 즉 동물중에서도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하다는 이성(理性)의 역량이 여전히 저급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성을 대한다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의 만행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고백하건대 나는 그 흔한 여성운동의 지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그 아류의 논리에 무장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지구상의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흔들림없이 여성에 대해 성()인식의 불균형, 아니 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잊을만 하면 터져 나오는 여성 상대 각종 범죄와 차별에 대해 가슴아파하는 사람일 뿐이다. 물론 여성 상위시대라는 요즘, 남성들의 상대적 위축에도 누구보다도 경각심을 갖고 성찰과 고민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의 공존을 바라는 평범한 생각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 치열했던 미투와 페미니즘 열풍을 겪고서도 우리나라 젠더 담론은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 압권은 단연 조동연을 향한 김병준의 브로치와 홍준표의 기막힌 사람발언이다.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강용석은 공동체의 삶에서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인물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남의 약점과 아픈 상처만을 건드리며 세상에 자기존재를 알리려는 강용석, 진중권 부류의 인간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게 역겹다.

역으로 생각하면 김병준과 홍준표의 마초이즘적 관념이 오히려 더 지탄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그런 정신문화적 잔재의 폭력성이 조동연이라는 피해자를 만들어냈다고 나는 확신한다. 왜 조동연이 혼외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정치를 하지 말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그가 결혼생활의 실패라는 굴레를 쓰고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모진 세파를 헤치며 가정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일궈낸 이 시대의 상징적인 워킹맘일 뿐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선에서 지금처럼 페미니즘 문제가 선거판을 휘두른 적도 없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대한민국 역사상 여성권익이 가장 신장되고 있다는 지금, 대통령 선거에서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 반사회성 문제가 최고 의제가 되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의힘 이준석과 진중권의 페미니즘 논쟁으로 일찌감치 포문을 열더니 여성 징병제와 여경 무용론에 이어 조동연, 그리고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된 이수정 논란에 이르기까지 이들 과정을 일관되게 지배한 것은 과연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냐는 문제다.

 

SNS에는 페미니즘이 부족하다고 욕먹은 대선 후보가 이긴다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소위 이대남들의 반감은 노골적이다. 누구보다도 여성과아동 문제에 천착한 범죄심리학자 이수정에 대해선 아예 여성혐오 유튜버들의 집단 항의가 이어졌다. 이같은 전후과정에서 돌연 떠오르는 건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문제다. 여자라고 해서 다 약자가 아니고 특별히 차별받는 소수자인 여성에만 해당된다는 논란에서부터 페미니즘을 꼭 여성에만 국한해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공방까지 이미 여러 차례 공론화된 것이 우선 주목된다.

이수정이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된 것을 계기로 이준석과의 사이에서 불거진 페미니즘(여성주의)과 래디컬리즘(급진적 여성주의) 시비는 어쨌든 실력있고 잘 나가는 인사들간의 인문학적 갈등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요구되는 지금의 시대적 페미니즘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화두를 던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최근 국민들이 진영으로 딱 갈려 다투는 대선판에서 부각되는 페미니즘은 다분히 상대의 성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페미니즘에서 래디컬이 조심스러운 것은 모든 사회적 맥락과 관계에서 아예 남성중심주의를 뿌리뽑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급진적 관점이 자칫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적대감, 해방의식만을 키우는 또 다른 성적 차별을 일으킬 수 있음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페미니즘은 여성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향상과 평등을 위해야 한다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완벽한 답은 되지 못한다. 여성문제의 정곡을 피해가는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평등적 공존을 위한다는 페미니즘이 적대적 감정을 수반해 추구된다는 것은 어찌됐든 옳지 않다. 그러기에 여성운동의 세계적 효시라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2의 성’(1949)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가 여성운동의 시작은 여성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여성도 같은 인간, 같은 인격체이기 때문에에 기반한다고 역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계약결혼한 남편 샤르트르의 난봉꾼같은 바람기로 인해 발동된 남성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과 피해의식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름답고 수줍은 여주인공이 대세였던 시대에 비록 못생겼지만 명문가의 가정교사로 들어가 주인과 격정적인 사랑으로 여성억압의 야만적인 인습에 반기를 들며 독립적인 삶을 산 제인 에어, 역시 부유한 삶을 뿌리치고 남성중심의 사회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나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 외치고 거리로 뛰쳐나와 끝내 행려병자로 숨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가 나혜석은 시대와 세월을 뛰어넘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싶다. 힘든 환경속에서도 여성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한 조동연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논리적으로 정립한 건 쥐뿔(?)도 없지만 페미니즘 하면 늘 떠올리는 생각이 하나 있다. 성 인식에 대한 남자들의 착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남성성(masculinity)과 마초이즘(machoim)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성징과 대비되는 남성성은 당연히 중요하다. 다만 이 것을 육체적인 물리적 힘만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넘쳐난다는 것이고 안타깝게도 여성을 상대로 한 각종 사회적 일탈과 범죄가 십중팔구 이로인해 야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리적 힘에서는 절대로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없다.

때문에 늘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것도 결국 인격, 인간됨됨이의 문제이고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기감정에 솔직하며 때가 되면 본능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하여 다음번 대통령도 후보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주문에 적합한 인물을 뽑아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배신과 냉혈(冷血)의 오만으로 삶이 점철된 썩어빠진 인간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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