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없는 대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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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없는 대선이라?
  • 한덕현
  • 승인 2021.12.2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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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거도 마찬가지겠지만 대통령 선거의 백미는 역시 후보 토론회다. 토론을 한다고 해서 그 것이 곧 후보의 모든 자질을 다 뒷받침하지는 않더라도 토론만큼 후보의 정체성을 대중에게 포괄적으로 알리는 계기도 없다. 경험으로 보면 과거 중요한 선거의 막판 판세도 토론회가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여건이라면 대중앞에서 말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보다 낫다. 어쨌든 상대를 이해시키고 또 설득하기 위해선 자기 심중을 말로써 표현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말솜씨가 서툴더라도 머리에 든 것이 있다면 굳이 토론을 기피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청산유수의 달변가보다는 좀 어눌하더라도 진심을 보이는 화자(話者)에게 오히려 더 신뢰감을 느낀다.

한덕현 발행인
한덕현 발행인

적절한 비교인지는 모르겠으나 해박한 식견과 독서량이 장점이던 김대중은 비록 세련된 달변은 아니었지만 논리와 조리있는 말로 토론회에서도 안정감을 주다가 결국 대통령이 되어 무난히 임기를 마쳤다. 반면 선거 초반부터 자신의 토론능력과 관련해 갖은 구설수에 휘말리던 박근혜는 토론마다 번번이 상대에게 밑천이 드러나는 열세를 보이다가 대통령이 되고서도 그 이미지를 털어내지 못하고 끝내 국정농단이라는 암초를 만나 탄핵되는 비운을 맞는다.

꼭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선출직이나 조직의 책임자에 오른 사람들의 언변(言辯)이 문제될 때마다 동원되는 말이 있다. 용인술과 관리론이다. 최고 책임자가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는 없고 단지 밑에 사람을 잘 두어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논리로 일견 맞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을 잘 쓰려면 본인부터가 알아야할 것은 알아야 하고, 조직관리 역시 스스로가 특정 사안에 대한 개념이나 관념을 정립하지 않으면 여러 난맥상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이다.

대통령 후보의 토론은 단순히 무슨 지식이나 상식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 됨됨이와 철학, 가치관 그리고 역사·사회관 등을 국민들에게 드러내어 평가받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 대통령 리더십은 어느날 갑자기,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정이 가능성을 가늠케 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토론회라는 이벤트인 것이다. 토론회를 꺼린다는 건 모든 사안에 대해 기본 지식조차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지도 1, 2위를 다투는 이재명 윤석열 후보가 토론회 개최문제로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한쪽은 토론회를 많이 하자 하고 다른 한쪽은 법적으로 규정된 것만 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양측이 갖은 이유를 들이대며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있지만 속내는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후보와 언변에 뒤지는 후보의 신경전에 불과하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변변한 후보토론회가 없다는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토론 기피는 단순하게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투표에 나설 국민, 즉 대중을 무시하겠다는 발상이고 이는 결국 나에게 대중은 만만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심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특히 정치와 국가통치라는 행위에서 일그러진 역사를 기록한 경우는 권력자들이 대중을 우매한 존재로 여기고 전횡과 광기의 여론전을 벌였을 때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그렇다. 괴벨스 어록으로 전해지며 만고의 경종을 울리는 그의 선동, 선전술은 하나같이 대중을 우매한 존재로 여기려는 못된 성정(性情)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인민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믿는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 되면 결국엔 믿게 된다”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 버린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자기 국민들을 시쳇말로 졸로 보지 않고선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다.

 

대학에서 독일문헌학을 전공하고 정치인이 되기 전엔 문학과 연극에도 종사하며 잡지사 편집장으로도 일했던 괴벨스를 연구한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혹세무민 능력은 그의 지나온 역정이 암시하듯 원칙보다는 효율성과 편의를 좇는데서 나왔고 어리석은 대중은 이런 표피적인 것에 휘둘리며 히틀러에 환호했다고 단정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대중은 어리석다. 어리석은 무리를 다스리는 길은 권모술수밖에 없다는 우민론(愚民論)을 펴기도 했다.

사회학과 경제학에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는 용어가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영리하고 똑똑한데 여러 사람이 모인 대중은 어리석다고 한다. 농부 개인이 농사를 열심히 지어 수확을 많이 내게 되면 값이 떨어져 농민들이 되레 손해를 보는 이치와도 비교된다. 개인은 합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만, 그 개인들로 구성된 군중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임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인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영민하기 그지 없지만 그들은 지금 떼로 몰려다니며 역대 최악의 비호감, 하여 자질조차 천박하다는 후보에게 쪼르르 달려가 눈도장을 찍기에 분주하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사석에선 모든 것을 꿰뚫듯 박식하고 똑똑함을 보이다가도 정치와 대선 얘기만 나오면 그저 좌우로 딱 갈려 반목하기 일쑤다.

군중은 정말로 이성적이기 보다는 즉흥적이고 감상적이며 일시적일까? 같잖은 우상에 현혹되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러한 화두가 최고 민주주의를 구가한다는 미국에서 절박하게 제기된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부시의 강한 미국’(strong america!)과 트럼프의 최고최강의 미국’(america first!)이라는 슬로건에 속아 이단아인 그들을 대통령에 뽑았다가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학습효과를 잊지 않기 위해 반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Just How Stupid Are We? · 리처드 솅크먼 )라는 책까지 펴내며 과거 잘못된 미국 대선을 반성하려 애쓰는 것이다. 역사를 후퇴시킨 대통령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대통령으로 만든 유권자를 비판한다. 지도자의 잘못은 궁극적으로 유권자에게 귀책사유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렇다. 21세기의 대중은 히틀러나 마키아벨리의 시대와는 다르다. 우매하거나 어리석지도 않고 무시당하지도 않는다. 무의식의 지배를 당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참여, 자율, 민주, 협치, 공동체, 커뮤니티를 외치고 싶어 한다. 그 결과가 촛불혁명에 이어 2030 세대들의 적극적인 정치관여로 나타나고 있잖은가. 우매한 민중(stupid crowd)이 아니라 영리한 군중(smart mob), 그리하여 참여 군중으로 역할하고 대접받기를 원하는것이다.

이렇듯 현명한 국민들이기에 후보의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인 선전술이 아닌 후보들간의 난상토론을 통해 그들을 판단하고, 감명받고, 선택하기를 바란다. 21세기에 20세기 정치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그러니 대통령을 하겠다면 더 이상 숨지 말고 토론할 것을 주문한다. 그 것도 끝장토론으로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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