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놓쳤던 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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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놓쳤던 음의 세계
  • 박소영 기자
  • 승인 2022.03.17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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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하면 답이 보이는 함기석 시인의 시집 '음시'
수학자 '누’시리즈…작가 자신 이야기 서술해
보이지 않는 마이너스 영역의 사건 끄집어내
수학과 과학 공부하며 쓴 시, 통찰력 돋보여

 

수학의 수식처럼 정교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시집이 나왔다. 함기석 시인(57)이 이번에 문학동네 시인선 시리즈 168번째로 <음시>를 출간했다.

음시는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수학을 빗대보면 마이너스의 영역을 다룬다고 할까. 글자 ‘음’은 소리, 읊다, 그늘등의 의미를, 글자 ‘시’ 또한 시간(時), 시(詩), 보이다(示)등을 담고 있다. 시인이 책 제목에 따로 한자병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시인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한양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을 가르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졸업 후 지금까지 늘 글을 쓰며 살았다. 그렇다고 ‘수학공부’를 놓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시를 쓰기 위해 수학과 물리를 공부한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오감도’를 쓴 시인 이상 이후 수학을 기저에 둔 유일한 시인일 것이다. 그는 2020년 ‘이상 시문학상’을 수상한바 있다.

 

 

알쏭달쏭한 세계

“고대 철학자들은 모두 수학자거나 자연과학자였죠. 시와 수학, 과학은 선대 때부터 한덩어리였어요. 너무 오랫동안 학문을 분리시키다보니 우리에게 고정관념이 있는 거죠.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수학과 물리를 알아야 돼요.”

이번 시집에는 85편의 시를 담았다. 시집 또한 공간U, 공간W, 공간R, 공간H, 공간T로 구획을 나눴다.
“공간U에선 공동체의 사회공간과 기억, 상처의 장소를 다룹니다. 또 증오와 애도의 공간일 수도 있고요. 꿈의 공간인 우주이기도 하죠. 공간W에선 전쟁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공간R은 현실세계를 다룹니다. 공간H에선 역사적인 사건과 할베르트 수학자가 등장하죠. 공간T는 수학자 누(Nu)시리즈를 담아냈어요.”

그 중 수학자 누(Nu)는 이집트 창조의 신으로 경계인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존재다. 모든 탄생의 공간에 존재했으나 동시에 꿈과 현실의 세계를 산다. 수학자 누는 수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시인이 된 그 자신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 ‘연인’에서는 본격적으로 시간이라는 축과 공간이라는 축이 이차방정식으로 나온다. 잘 들여다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복소수좌표는 3차원 좌표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여야의 관계이기도 하고, 이분으로 얽혀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또 역사의 허위는 양의 그래프로 표기했다. 시 ‘연인’-분터골 매장지 유골 분석함수, 라인이 된 혼령들의 타임‘에서는 그래프 아래 검게 그을려진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작가는 그곳이 역사가 빚어낸 부패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해석되지 않거나 규명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민간인 학살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이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죠.”

시시포스처럼 힘겹게

시 ‘부조화 연인’은 유령시인 시시포스와 우주소녀 서클이라는 내용을 23.5가 기울어진 직각삼각형과 원으로 표기한다. 끊임없이 돌덩이를 지고 언덕위로 올려야 했던 시시포스는 예술가의 길을 걷는 시인의 삶의 엄중함을 말하고, 그 무게가 끝이 없음을 은유한다. 행성에서 태어나 우주를 향해가는 시인으로서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 ‘흑벽 벽돌 수용소’에서는 어둠 속 225인의 유대인 포로와 가시철조망을 글자 ‘말’로 형상화한다. 그에게 ‘말’은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시인은 말의 속성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말은 도와주는 자이자, 가두는 자이죠. 말이 갖고 있는 상반성이 있어요. 보조이자 조력자로 나의 생각을 전달해주지만 그 말 안에 갇히기도 하니까요. 정부나 국가가 개인에게 하는 말 또한 나를 도와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폭압하기도 하죠.”

그는 무언가 억압받는 게 싫다고 말한다. 획일적인 것에 대해 철저히 저항하며 살았다. 그가 늘 시를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펼치는 것도 기저에는 저항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좋아해요. 우리가 가시적인 영역에서 놓쳤던 것들을 꺼내고 싶었죠. 저는 시를 전에 썼다가 지금 쓰지 않는다면 전직 시인이나 퇴직 시인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직업엔 현역이 있고, 전직이 있는데 시인은 그런 게 없어요.”

시를 쓰고, 동화도 쓰고 평론집도 꾸준히 낸 작가는 지금까지 다수의 책을 펴냈다. “수학과 과학의 논리적 사고의 틀로 시를 쓰고, 시의 사유로 수학과 과학을 보면 분명 통하는 부분이 많아요. 우리나라 현대시가 개인의 감정에 기대다보니 더 이상 팽창되지 않는 게 안타까워요. 제가 쓰는 시를 읽고 누군가는 사고의 틀이 열리면 좋겠어요.”

그는 그가 만들어낸 ‘수학자 누’처럼 오늘도 시의 세상을 창조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경계인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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