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소크라테스를 살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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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소크라테스를 살해했는가?
  • 최용현 변호사
  • 승인 2022.04.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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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재판과 죽음에 숨겨진 진실들(1)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399) 재판과 죽음은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를 비판하는데 가장 자주 거론되는 소재입니다. 많은 학자들과 교과서들은 소크라테스 사례를 들며 아테네 민주정치가 중우(衆愚)정치로 귀결될 위험성이 크다고 가르쳐 왔으며, 불의한 권력과 무지한 대중에 맞서 자유와 정의를 외친 철학자, 그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준법정신을 강조하며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순교자로서 소크라테스를 추앙해왔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역사적 인물들 중 소크라테스만큼 대중적으로 친숙한 인물로는, 아테네 민주정체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429)가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30년 프닉스 언덕에서 스파르타와의 전쟁 중에 사망한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연설을 했습니다.1) 여기서 그는 아테네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고 활기가 넘치고, 모든 시민들은 법을 철저히 준수할 뿐더러 공적인 일에 적극 참여하고 사려 깊게 처신한다며 자신들의 민주정체에 대해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의 소크라테스 재판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소크라테스가 맞선 것은 불의한 권력·무지한 대중·악법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권력·사려 깊은 대중·정의로운 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끈임 없이 주입되어 온 앞서의 상식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그것이 잘못되거나 과장된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소크라테스에 대한 우리의 상식, 무엇이 문제인가

소크라테스는 나이 70세에 법정에 소환됐습니다. 아테네의 법정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고대 아테네에는 우리처럼 전문적인 법관·검사·변호사가 없었습니다. 일반 시민이 범법자를 고발 기소하고,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변론하고,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그 재판을 담당했습니다. 소송은 1심으로 끝나고 단 1일로 종결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당시 재판절차는 먼저 고발자와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유무죄 판단하고, 유죄 평결이 있으면 이후 양형 평결이 있는데, 이때 고발자와 피고인은 각자가 원하는 형종(刑種)과 형량(刑量)을 제의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도 이렇게 일반 시민 501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시민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유무죄판단에서 유죄 281/무죄 220표 받아 근소한 차이(61표차)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양형판단에서는 361/140표로 오히려 더욱 불리하게(221표차)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의하면, 당시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입니다. 사형까지 선고된 죄목치고는 너무나 모호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연구자들은 그가 고발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것은 실질적으로, 1) 비사교적인 그의 평소 언행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반감, 2) 그의 반체제적(반민주적) 정치철학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의구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도 많은 시간을 들여 이 두 가지 점에 대하여 변론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지독히 못생겼습니다. 그리고 맨발로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거의 씻지 않고 1년 내내 허름한 1벌의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젊어서는 부친의 석공소에서 일을 했으나, 부친이 죽으면서 유산을 남기자 일을 그만두고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지냈습니다. 나이 50줄에 결혼하여 아들 3명을 두었으나 가족의 부양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직업은 귀족이나 정치인, 작가, 상인, 수공업자 등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라는 것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대화 상대방들을 무한정 추궁하여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한가 자인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로부터 확인된 그들의 무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하고, 자신은 적어도 그들보다는 현명하다고(최소한 자신은 자기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떠벌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자신의 평소 행태에 대하여, 인간이 가진 지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경고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궁극적인 지혜와 정의를 찾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고행이었다고 변명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상대방 면박주기와 자기 자랑질로만 여겨졌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이러한 외양과 행태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연극이 유행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에게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니며 지혜와 정의라는 추상적인 주제만 갖고 대화를 한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 대하여도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빈민이나 하층민들이 무지하고 탐욕에만 빠져있다고 경멸하고, 조국인 아테네의 민주정체를 이러한 민중들에 의한 중우정치라고 조롱하고, 오히려 철저한 신분제 독재국가로 아테네와 전쟁 중인 스파르타를 탁월한 국가로 추켜세우고, 치졸하고 오만한 독재자였던 아가멤논을 역사에 남을 위대한 군주로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이 있기 몇 년 전 아테네 일부 귀족과 반민주주의자들이 2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과두 독재정부를 수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자 중에는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2)

이러한 연유로 그는 체제 전복의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은 이 쿠데타와 무관하며, 자신은 민주정부와 쿠데타정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오직 자신의 정의 원칙에 따라 처신하여 왔다고 항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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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리클레스의 추모연설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연설로 평가받습니다.
2) 소크라테스 제자들 중에는 아테네에 해악을 끼친 인물이 유독 많습니다. 특히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그렇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와 전쟁중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몇차례나 오가며 배신을 일삼았고, 크리티아스는 스파르타의 힘을 빌어 쿠데타를 일으켜 과두정부를 수립하고는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했습니다. 플라톤은 크리티아스의 5촌 친척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 쿠데타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죄목 중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이러한 점이 반영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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