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한다고?
상태바
국회의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한다고?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04.27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안의 민주주의론(1) : 참여·숙의·추첨 민주주의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많은 정치학자들은 현대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정치적으로 평등하지만 정치적 대표의 자리는 사실상 부유층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변했고, 정치경쟁은 천문학적 돈과 미디어에 의해 작출된 이미지 경쟁으로 전락했고, 또한 기업 권력의 정치에의 영향력은 점증하고 있고, 정치의 많은 부분은 민주적 대표성을 갖지 않는 관료 권력과 전문가 그룹의 손에 내맡겨졌고, 정치적 결과물도 서민들의 이익과 동떨어진 채 기업과 부유층 편향적으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폐해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말했던 대의와 선거 제도의 귀족적·과두적 본성을, 그리고 고대 아테네인들이 경계하고자 했던 정치의 계급·엘리트·관료화를 연상케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의민주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민하던 진보 학자들(참여·숙의·추첨 민주주의자들)이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에 주목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는 21세기 정치적 상상력의 원천?

지난 세기말 등장한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주장자들은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회처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마을의 일상사를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몇 지자체에서 주민참여예산제도와 같은 방식으로 일부 실시되기도 합니다. 보다 급진적인 참여 민주주의자들은 고대 아테네와 같은 지역공동체는 물론, 기업·공장·학교·병원 등 사적 조직에도 이런 민주적 자치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정치는 공적 영역에 한정되는 것으로, 기업과 같은 사적 영역에는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삶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4년마다 있는 투표행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사적 영역입니다. 이러한 영역이 사적이라는 이유로 민주주의 원칙에서 제외된다면, 사실상 시민들의 삶의 질 개선은 요원합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원칙의 사적 영역으로의 확대, 특히 기업의 의사결정에 노동자들이나 소비자,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이들은 기업의 내·외부적 ‘정치성’을 강조합니다.

현대의 기업은 내부적으로 지배와 복종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수직적 권위체계라는 점에서 국가와 차이가 없습니다. 나아가 기업은 국가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기업을 위하여 직·간접적으로 막대한 공적 재원을 투여하고 있으며, 기업의 결정과 활동은 국가와 시민들에게 막중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기업은 내·외부적으로 국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이기에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숙의(심의) 또는 토의 민주주의(Deliberative / Discursive Democracy)는 반드시 참여 민주주의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고, 현대 대의민주주의와도 연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숙의 민주주의는 참여의 수보다는 참여의 질 제고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사실 참여 증대만으로 참여의 질 문제에 대처할 수 없으며, 참여 증대는 오히려 결정의 합리성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숙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하면 민주적 결정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단지 투표에서 나타나는 현재적이고 경험적인 선호의 총합이 아니라, 정제되고 사려 깊은 논증과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체 시민 중 특정한 방법으로 선정된 일부 시민들을 며칠 동안 일정한 장소에 모아 공적 사안에 대하여 사려 깊게 토론하도록 한 후 직접 정책을 결정하게 하거나, 또는 이러한 숙의 과정을 통하여 변화된 참여자들의 의사를 공표하여 간접적으로 의회나 여론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방식이, 그들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새로운 대안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의 재건설 문제를 놓고 구성된 공론화위원회도 숙의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에서 추첨으로 바꾸자고 제안

사실 참여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시민자치는 고대 아테네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실천할 수 있지만, 현대 국가와 같은 수준에서도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현대의 발달된 컴퓨터·인터넷·SNS 기술 등을 활용하면 국가적 수준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사려 깊은 토의나 바람직한 결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긴 힘듭니다.

1) 아테네적 시민자치에 가장 비판적인 정치학자는 보수계열의 정당 민주주의자인 사르토리(Giovanni Sartori)입니다. 그는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에서, 고대 아테네를 개인적·사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최악의 정체로 평가하고, 이를 모방한 현대의 참여모델에서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은 전자적(electronic) 방식에 의존한 ‘국민투표적 민주주의’뿐인데, 이는 자살하는 것과 같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에 점점 증대되고 있는 추첨 민주주의(Sortition Democracy) 주장자들의 제안은 귀 기울만 한 가치가 있습니다. 추첨 민주주의자들은 현재의 의회를 대신하여,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혹은 성·연령·지역·계층·직업별 구성 비율에 따라 추첨으로 수천, 수만 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의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현대의 대의제와 고대 아테네의 추첨제를 연계한 것으로, 대의의 방식을 선거에서 추첨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선거에 의한 대표와 달리, 추첨에 의해 선출된 대표는 보통의 시민이기에 일반 시민들의 의사와 이익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할 것이라는 점이 이들 주장의 핵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색당이 대의원을 추첨제로 선출하기도 합니다.
현대 대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이 등장한 참여·숙의·추첨 민주주의자들의 근본 취지는 고대 아테네처럼 정치를 시민들의 손에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이들은 이러한 시민들에 의한 정치로 1) 시민들의 공적 사안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내고, 2) 정치과정에서의 기업과 부유층 편향성을 제어하고 민주적 책임성 없는 관료·언론 권력 등의 영향력을 최소화하여, 3) 그럼으로써 보다 시민들의 의사와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추론은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논증되지 않은 전제를 바탕으로 한 순진한 추론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이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의 실제 현실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아테네적 시민자치에 가장 비판적인 정치학자는 보수계열의 정당 민주주의자인 사르토리(Giovanni Sartori)입니다. 그는 ≪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에서, 고대 아테네를 개인적·사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최악의 정체로 평가하고, 이를 모방한 현대의 참여모델에서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은 전자적(electronic) 방식에 의존한 ‘국민투표적 민주주의’뿐인데, 이는 자살하는 것과 같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