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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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한다고?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05.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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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의 민주주의론(2) : 참여·숙의·추첨 민주주의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429)는 아테네인들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사려깊고 충분한 토의를 극찬1)하고 있지만, 이는 현실을 과장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만을 낳는다? 정치적 유아에 불과!”

우선 시민들이 공적 사안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는 의지와 열정을 가졌다는 전제는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별반 관심이 없거나 이해관계가 없는 공적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노고와 비용을 수십 시간 혹은 며칠씩이나 기꺼이 투자할 용의가 있을까요?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을 위해 돈을 벌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비록 자신의 직접적 수고가 없더라도, 다른 누구 혹은 제도에 의해서(예컨대 현재처럼 의회나 정당에 의해서라도) 공적 문제들이 적절히 처리된다면 이에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요? 일상의 곤란에 직면해 수리업자·의사·변호사에게 맡기듯, 정치를 전문가에게 맡기고 시민들은 뒤에서 느긋하게 이들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필리프 폴츠의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모연설>

 

모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참여를 했다는 고대 아테네의 실제는 어땠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그들을 너무 이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테네인들이 민회참석 수당을 지급했다는 것은 사실 회의 정족수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습니다.

실제 아테네에서는 민회가 열리는 날이면 시민들이 시장을 찾지 못하도록 점포를 강제로 철시토록 하고, 민회가 시작될 때면 정족수를 채우고자 거리의 시민들을 잡아 민회 장소로 줄줄이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개인적 돈벌이 욕심도 적고 오락거리도 부족했던 반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회 결정에 대하여 이해(利害)관계가 높았던 아테네인들조차도, 공적 사안에 관한 관심과 참여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민들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는 정치의 계급·엘리트·관료화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정치가 보다 친시민적인 결과를 산출토록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이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참여·숙의·추첨 민주주의자들은 정치를 재판처럼, 정치 무대를 법정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판은 투명하게 개방된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동등한 능력과 권한을 가진 배심원들이 중립적(불편부당한) 입장에서, 각각의 당사자들이 내놓은 선택지를 비교 형량하여 최종 결정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정치 무대는 전혀 동등하지도 투명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각 개인·집단·부문·계급들이 가진 정치적 자원과 영향력의 크기는 현격히 차이가 납니다. 이는 그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지 않거나 모든 이들이 그 무대에 오르더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동등한 다수가 정치 무대에 북적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상 그 무대를 지배하는 자는 그 무대 뒤의 (우월한 정치적 자원과 영향력을 가진) 기업·관료·언론 권력들일 것입니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시민들이 선택 가능한 그리고 중립적인 모든 선택지를 놓고 결정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는 그 선택지를 사전에 작성하고 조율하고 한계 지우는 자는 거대한 이들 권력이고, 시민들의 결정은 그렇게 제약되고 폐쇄된 선택지들 사이에서 쳇바퀴 돌 듯 공전할 수 있습니다.

정치 무대에서 북적이는 다수는 오히려 이들 권력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기 파시즘이나 제3세계 독재국가의 경우처럼, 그런 다수는 이들 권력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언제라도 쉽게 선동되고 동원될 수 있습니다.

시민자치라는 대안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기 지배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대의민주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차의 정의로움이 결과의 바람직함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2)는 베버(Max Weber)의 말처럼요. 시민자치가 정치의 계급·엘리트·관료화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정치가 보다 친시민적인 결과를 산출토록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업·관료·언론 권력의 정치적 지배와 영향력을 강화하고 영속시킬 수 있고, 그로 인하여 보다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안의 민주주의자들이 흔히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에서의 조직과 리더십의 문제입니다. 참여의 수나 범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정치에서 조직과 리더십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는 참여의 수와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은 아테네 일반 시민들이 실제 정치 무대에 선 배우나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3∼4만 혹은 6천 명의 시민이 자치하던 아테네에서도 사실상 회의장에서 발언권을 쥐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자는 소수의 정치선동가와 파벌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정치 주체라고 하지만 실제 아테네 일반 시민들은 이들의 주장에 환호하거나 야유하는 청중이나 관중에 가까웠습니다. 아테네의 정치행태의 실질은 그 규모만 작았을 뿐 정치엘리트와 정당이 주도하는 현대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민자치건 대의제이건 참여의 수나 범위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조직과 리더십입니다.

정치에서 다수라는 것은 그들이 원자·분산·휘발적이라면 그냥 다수일 뿐입니다. 그들이 집적·집중·누적될 때만이 그 다수는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조직과 리더십을 갖지 못한 다수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시민이 아니라 그냥 북적이는 대중이나 군중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수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그 다수로 하여금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고, 그 다수가 선택하기 쉽도록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력이 중요합니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민주주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조직과 리더십의 역할이지, 풀뿌리 차원에서 창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3)라는 정당 민주주의론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의 주장이,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국가적 수준에서는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거대하고 막강한 공적·사적 조직(관료와 기업)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정치엘리트와 정당에 의한 민주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베버의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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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리클레스의 다음의 말은 참여·숙의 민주주의 이론의 단초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심지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 일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아테네에서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책에 관한 결정을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내리거나 적절한 토의에 회부하는데,… 가장 나쁜 것은 결과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행동부터 취하는 것입니다.”- 투키디데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2)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3)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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