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와 극좌는 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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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극좌는 서로 통한다?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07.0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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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정치신학≫을 중심으로 (1)

전회에서 : 극좌와 극우는 가치 지 향(평등-불평등)은 정반대이지만, 자유주의적 헌정질서를 증오하고 경멸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이러한 극단의 정치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는 카를 슈미트입니다.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 1985)는 헌법학계에서 최고의 학자입 니다. 그의 결단주의적 헌법학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나치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나치즘을 창설하거나 처음부터 나치즘을 추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위주의적 정치인들을 위해, 의회민주주의나 규범주의 주장에 맞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옹호하는 법률적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으로 극좌 공산당은 물론 극우 나치운동도 체제의 적으로 선포하고 무력화하여 헌정체제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연히 그의 이러한 변론을 지켜본 나치가 그의 정 치에 대한 태도가 자신들의 추구하는 정치노선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정권을 잡은 후 그를 사법자문관, 계관법학자 로 초빙하여 예우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나치 부역 혐의로 슈미트는 종전 후 2년 정도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주저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정치신학≫은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 소렐 Georges Sorel)의 ≪폭력에 대한 성찰 ≫과 더불어 가장 ‘위험한’ 정치고전으로 꼽힙니다. 위험하다? 그들의 사유 의 시작과 결론이 극단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더욱이 그들의 사상 이 때론 극우적으로 때론 정반대로 극좌적으로도 해석되기에 그렇습니다.

슈미트는 극단의 권위주의와 나치 부 역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임에도, 지난세기 후반기에 수많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구애를 받 았고, 특히 네오콘의 대부인 레오스트 라우스(Leo Strauss)는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 학자들 중에는 무페(Chantal Mouffe), 지젝(Slavoj Zizek)과 같은 급진 좌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정치철학에 어떠한 매력이 있 기에, 현대의 극우파는 물론 극좌파들까지 그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극우와 극좌 모두 슈미트에 주목하다

슈미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독특합니다. 그에 의하면 20세기 초반 영미 세계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배하던 자유주의, 의회주의, 다원주의, 관료주의, 경제주의, 기술적 합리주의, 규범주의, 법실증주의적 사고로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양복쟁이들의 교양 있 는 말투와 계산적 타협은 정치가 아니 며, 이는 정치의 부정(否定)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것으로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그것으로는 정 치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공산주의나 러시아 혁명정권에 경도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도로서 그들에 대한 적대감은 뼈 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 의나 무정부주의도 영미식의 탈정치적 사고체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슈미트는 일상의 형식적·공식적인 정치적 제도와 절차를 의미하는 ‘정치(politics)’라는 용어대신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정치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이란 어떠한 것을 의미할 까요?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 지 적극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다 만 정치적인 것의 특유의 본성에 대하 여만 질문하고, 그것은 ‘적(敵)과 동지(同志)의 구별’이라는 독자적인 표지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

정치적인 것에는 그것에 특유한 표지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특정 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동이 모두 거기에 귀착될 수 있는, 거기에 고유한 최종적인 구별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것의 영역에서 최종적인 구별이란 선과 악이며, 미학적인 것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이고, 경제적인 것에서는 이(利)와 해(害), 즉 수 익성과 비수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라는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적과 동지에 선악, 미추, 이해의 대립들이 추가되거나 혼재되면 적과 동지의 구분과 대립의 선명성이나 강도를 높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의 표지는 이들 다른 구분 기준과는 분별되어야 하는 독립적인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의 표 지인 적과 동지는 누구를 지칭할까요? 역시 슈미트는 적과 동지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방인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낯설고 이질 적인 존재라는 것으로 족하다.”

다만 “적이란 경쟁 상대 또는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또한 적이란 사적인 혐오감 때문에 증오하는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단지 적어도 때에 따라서는, 즉 현 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이며, 바로 그러한 전체와 대립하는 전체이다.

따라서 적이란 공적인 적, 공적(公敵)만을 말한다.” 슈미트에 의하면 탈정치를 내세우는 주류적 사고도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를 말살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정치의 본질을 윤리적 혹은 경제적인 것으로 은폐하고 치장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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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대 학 졸업후 우연히 고시공부를 하게 되어 사법고시, 행정고시, 지방고등고시 3과에 합격했다.
10여년 검사,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대학시 절 공부했던 정치학에 미련이 남아, 현재는 법조현장에서 물러나 공증인 일을 하며 정치와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HCN 충북방송 정치시사 토론프로그램(리얼토크 한판)에 고정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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