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와 극좌는 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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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와 극좌는 서로 통한다?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07.1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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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정치신학≫을 중심으로 (2)

전회에서 : 카를 슈미트는 극단의 정치철학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학자 입니다. 그는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슈미트에게 정치(적과 동지의 구분)의 최고의 결절점은 국가입니다. 적과 동지는 평소에는 잘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전과 전쟁과 같은 파국적 상황에서는 그 실체를 명백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에서 예외적인 사태가 아닌가? 여기서 슈미트는 정반대로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내전과 전쟁)이 예외적으로만 발생한다는 것은 그 규정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확증하는 것”으로, 오히려 “이러한 예외적 사태는 결정적이며 사물의 핵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 국가의 통치자인 주권자는 어느 개인 혹은 집단이 내부의 적인지, 그리고 어느 국가가 외부의 적인지를 결정합니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여기서의 ‘결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무제약적입니다. 1) 지금의 상황이 주권자가 결정할만한 예외상태에 해당되는가에 판단은 오직 주권자 자신의 의사에 따를 뿐이고, 2) 그러한 상태에서 주권자는 어떠한 권한과 수단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역시 오직 주권자 자신의 의지에 따를 뿐입니다. 양자 모두에 미리 주어진 제약이나 한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법학자들은 이러한 예외상태나 그 상태에서의 주권자의 권한을 미리 규범으로서 제약하려는 헛된 노력이나 이를 법학 이외의 문제(사실적 문제나 사회학적 범주의 문제)로 치부 하려는 소심함에서 벗어나, 이러한 주권자의 무제약적 결정권에 대하여 모두 인정하고 그의 권한과 행위를 정당하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슈미트는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주권자는 누구이며, 그의 이러한 무제한의 권위는 어떻게 정당화될까요? 여기서 슈미트는 영미의 주류적 사고에서 벗어난 권위주의적 사고 흐름에 주목합니다.

그 대상은 16-7 세기의 종교전쟁과 내전의 피폐와 공포에 대응하여 국가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한 보댕과 홉스, 그리고 18-9세기 유럽혁명의 시대에 군주정을 신학적으 로 정당화하고 군주정 회복을 위한 반동 쿠데타를 주장한 보날드, 메스트르, 코르테즈와 같은 카톨릭 계열의 반동적 정치가들입니다. 슈미트는 주권자를 인격적 실존(주권의 인격적 담지자로서의 군주 또는 대통령)으로 정의하고, ≪정치신학≫이라는 책 제목처럼 예외상태와 주권자의 결정을 신학적 유비(類比)로써 정당화합니다.

신학에서 모든 질서는 신의 의지와 규범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이 의문시 되거나 부정될 때 인격화된 신이 ‘기적’을 통하여 신의 규범의 존재를 다시 선언합니다. 그처럼 예외상태의 이르러 주권적 인격이 ‘결정’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질서와 규범을 다시 정립한다는 것입니다.

슈미트의 정치에 대한 생각은, 정치를 대립하고 갈등하는 계급과 정치세력간의 대화와 타협, 공존과 상생으로 바라보는 자유민주적적 사고와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슈미트는 적과 동지로의 구분, 이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주권자의 독재적 결단만이 정치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슈미트의 이러한 주장은 일견 홉스와 마르크스를 연상케 합니다. 홉스는 내전의 공 포는 절대군주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마르크스는 계급간 의 대립과 갈등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 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하여 앞 서 지적했듯 현대 미국의 신보수주의 (Neo-Conservatism)자들과 혁명적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시에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위기가 독재를, 아니 독재가 위기를 필요로?

 슈미트의 정치철학은 극단의 정치 세력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의 한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은 계급이나 정치 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이 종국에 독재를 필요로 한다고 사유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요? 오히려 독재를 위해 적대와 위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이러 한 역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을 위하여, 북한의 도발은 언제나 현실화 될 수 있는 공포로 받아들여져야 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은 좌경용공세력으로 계속 꾸며져야 했습니 다. 그리고 그 독재정권에 의해 민주적 헌정질서는 붕괴되고 계속 유예되었고, 종국에 그 독재정권은 더 큰 적대와 위기를 낳아 파국적 결말로 귀결되었습니다. 현대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장도 이와 유사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현대 미국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소련 공산권의 붕괴와 자본주 의의 보편화에도 불구하고, 테러위협 이나 금융붕괴사건과 같은 안보와 경 제 위기는 여전합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은 토론과 타협 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절차는 무용하고, 통치자의 결단에 의한 신속한 처리가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대테러 명분의 군사예산 과 직접적인 군사위협은 점증하고, 법적 통제영역 밖의 감시·감옥체계는 계속되고, 대통령 독단에 의한 정치적·행정적·경제적 제재는 갈수록 빈번해집니다. 대외적으로 미국, 대내적으로 행정부의 일방통행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위기와 적이 만들어지고, 위기와 적은 항상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적대와 위기가 독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를 위하여 적대와 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보다 역사적·현재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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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졸업후 우연히 고시공부를 하게 되어  사법고시, 행정고시, 지방고등고시 3과에 합격했다.
10여년 검사,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대학시 절 공부했던 정치학에 미련이 남아, 현재는 법조현장에서 물러나 공증인 일을 하며 정치와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HCN 충북방송 정치시사 토론프로그램(리얼토크 한판)에 고정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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