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당,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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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정당, 어떻게 할 것인가?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09.0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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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을 중심으로 (2)

 

전회에서 : 진보적 정당민주주의자 샤츠슈나이더는 사회적 갈등들은 정태적이지 않고 경쟁적·역동적 성격을 갖고 있다며, 그것을 리드하는 정치 기제로서 정당에 주목합니다.

 

또한 샤츠는 정당은 사회적 균열에 따른 사회적 대립과 갈등의 단순한 반영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이 어떠한 갈등축을 선택하고 어떠한 갈등축을 배제하고 어떻게 대중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정치경쟁의 양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정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의 성공여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갈등축을 동원하고 그렇지 않은 갈등축을 부수적이거나 종속적인 것으로 편제하는 능력과 그러한 정치적 대립에 따라 얼마나 많은 구경꾼(시민)들의 관심이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184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차티스트(노동자 참정권 운동) 집회
184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차티스트(노동자 참정권 운동) 집회

 

정당, 갈등의 편향적 동원

 

샤츠는 그 대표적 사례로 1896년부터 30년간 미국 정치를 지배하였던 지역정당체계와 이를 극복한 1930년대 루즈벨트 등 민주당의 새로운 엘리트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정당체계의 폐해가 심각한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적 분리나 양쪽 주민의 차이가 영남-국힘, 호남-민주당이라는 정당체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결과를 만들 정도로 양쪽의 지역적·전통적·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지역정당체계는 기존의 보수양당과 정치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지역 갈등축을 주요한 갈등축으로 동원한 결과라는 것이 샤츠 독해가 시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지역정당체계는 1932년에 이르러 붕괴되는데, 이는 대공황으로 인하여 지역 갈등보다 사회경제적·계급적 갈등이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루즈벨트 등이 이러한 새로운 갈등을 지배적 갈등으로 삼기 위하여 노동자·빈민을 대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구사했기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파벌·정당·집단·계급 등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방식에 달려있다. 정치라는 게임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잠재된 갈등 가운데 어떤 갈등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갈등의 대체는 가장 파괴적인 정치전략이다.정치에서 가장 파국적인 힘은 하나의 갈등을 전혀 다른 갈등으로 대체하면서 기존의 모든 갈등 구도를 뒤바꿔 놓은 권력, 즉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을 연결 짓는 권력이다.

지역 갈등이 지배적 갈등으로 부각되는 지역정당체계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효과는 어떠한 것일까요? 지역정당체계에서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우월적으로 지배하기에 시민의 투표 가치는 현저히 저하됩니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참여 의욕과 필요성은 감퇴되고 기존의 보수 엘리트들의 지배구조를 고착화됩니다. 또한 시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타 갈등은 정치 무대에서 제대로 대표되지도 다루어지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체 내지 퇴보입니다. 1930년대의 루즈벨트 등에 의한 갈등의 대체로 어떠한 효과가 발생하였을까요? 샤츠는 이러한 갈등의 대체로 정당경쟁은 전국 규모로 확대되고 보다 경쟁적으로 되었으며, 대중의 정치참여도 확대되고, 정치 의제도 그 폭이 넓어지고 대중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보다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만이 희망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서 정당은 모든 정치적 패악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진보 학계에서는 대의·정당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참여·숙의 민주주의와 같은 시민자치 모델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샤츠는 시민자치 모델은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 국가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며, 현대 민주정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여전히 “(정당과 정치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조직과 리더십의 역할이지, 풀뿌리 차원에서 창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합니다.

정당을 통한 민주주의 진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주장은 얼마나 타당할까요? ()는 정치에서 가장 주요한 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집적되고 집중되지 못한다면 그 수는 정치적 힘으로써 무의미합니다. 가사 시위와 집회로 그 수의 힘이 정치적으로 표출되더라도 그것이 체계적으로 누적되지 못한다면 한낱 용쓰기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논리를 먼저 깨달은 것은 오히려 반대편의 지배계급이었습니다. 18-9세기부터 서서히 등장하던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적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빈민들이 선거권을 갖고 정치를 전횡할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수세력들이 생각해낸 것은, 정치가 다룰 수 있는 주제와 영역을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여기에 더하여 노동자와 빈민들의 다수라는 잠재된 힘이 정치적으로 집적·집중·누적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정치 무대에 새로 등장하는 두려운 다수를 원자·분산·휘발화시켜 그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보수 지배층의 정치전략이라면, 진보 세력의 정치전략은 정확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다수 대중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문제를 정치의 주요 주제로 만들어 이들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내고, 그렇게 분출된 그들의 힘을 특정 주제에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지속적으로 누적시키고, 그들의 불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적실성 있는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과 실천적 프로그램을 만드는 조직과 전략,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기제는 바로 정당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당과 정당체계는 참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만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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