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근의 집요함이 살려낸 충북 단양 ‘시루섬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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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근의 집요함이 살려낸 충북 단양 ‘시루섬의 기적’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2.09.0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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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강희가 만났습니다
김문근 단양군수

고향 단양군의 부군수로 가서 8년 동안 시루섬 수해 증언·자료·사진 수집
2022년 군수 당선되자 1호 사업으로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행사’ 거행
생존자 초청해 합동 생일잔치 열고 ‘시루섬의 영웅들’ 책 발간 준비 중

 

 

김문근 단양군수
김문근 단양군수

 

‘시루섬 영웅들 50년만에 다시 만난다’ ‘단양군 8월 19일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기념식’ ‘지름 5m에 197명 빼곡..재연된 ‘시루섬 기적’ ‘단양군 시루섬 기적 정신 되새긴다’.

지난 7~8월 수많은 언론들이 충북 단양군의 ‘시루섬의 기적’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래서 국민들은 50년전 단양 시루섬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 단양군은 50주년 기념식을 열었고 생존자들은 상봉의 기쁨을 맛봤다.

이 것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국민들도 이를 서서히 잊어갔다. 국제정세는 불안하고, 국내 여야 정치권은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고, 물가는 올라 살기가 점점 팍팍해져가는 게 현실이다보니 이 일 또한 잊혀졌다. 하지만 김문근(64) 충북 단양군수는 그렇지 않았다.

시루섬의 기적은 지난 1972년 8월 19일에 일어났다. 그런데 단양군에 이런 기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동안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올해가 50주년인데 10, 20, 30, 40주년 기념 행사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김 군수를 만나자 궁금증이 풀렸다. 이 일이 화제가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김 군수는 시루섬의 기적에 대한 역사를 찾기 위해 8년을 바쳤고, 올해 비로소 세상 밖에 내놓은 것이었다.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던 그는 2013년 7월 1일 고향 단양군의 부군수 발령을 받고 갔다. 이듬해인 2014년부터 시루섬 기적 자료와 생생한 증언, 사진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는 단양군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소설같은 얘기였을 것이다. 기록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당시 기록적인 폭우와 단양강 범람으로 시루섬 마을 주민들은 순식간에 고립됐다. 그러자 주민 198명은 인근에 있던 높이 6m, 지름 5m의 물탱크에 올라가 14시간의 사투 끝에 살아난다. 비록 8명이라는 인명피해가 있었으나 주민들은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희생정신과 서로 손을 꽉잡고 고통을 견디는 협동정신을 보여줬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싸우지 않고 감동적인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시루섬의 기적' 기념비와 상징 조형물. 왼쪽은 아기를 안은 최옥희 님
'시루섬의 기적' 기념비와 상징 조형물. 왼쪽은 아기를 안은 최옥희 님

 

지난 5일 군수실에서 만난 김 군수는 ‘시루섬의 영웅들’이라는 두툼한 자료집을 내놨다. 거기에는 ‘김문근이 8년간 발굴한 그 날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간략히 요약하면 몇 줄 밖에 안되는 사실이지만 김 군수는 A4 용지로 214쪽에 달하는 자료집을 보여줬다. 다음은 김 군수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 자료집을 혼자 만들었나? 혹시 행정기관에서 한 게 아닌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긴 했으나 내가 만들었다. 내년에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은 영웅담이 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람들이므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시루섬의 기적이 소설, 시, 연극, 그림, 영화 등으로 만들어지길 기대하며 이 글을 썼다. 반백년이 지난 일이라 증언자간 서로 상이한 부분이 있고, 나 또한 미흡하게 기록한 곳이 많지만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김 군수는 책으로 펴내기 위한 작업을 거의 마친 상태다. 자료집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시루섬의 역사, 마을 특성, 물탱크, 수해가 있던 날의 상황, 섬 탈출과정, 생존자들의 증언, 수해 당시의 언론보도와 사진 자료 등이 실려있었다. 그는 당시 사진 한 장을 찾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생존자를 만나 얘기를 듣고 녹음해 풀어쓴 과정, 오래된 신문기사를 인용하기 위해 들인 시간 등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듣는 사람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김 군수가 이렇게 집요했나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 왜 그렇게 이 사건에 매달렸는가

“나는 1980년 단양군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는 시루섬 수해가 난지 8년밖에 안돼 사람들이 시루섬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흘려들었다. 그 후 2013년 단양군 부군수로 가게 됐다. 그 때 또 시루섬 수해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물탱크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들을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이 때 이런 역사를 누군가 모아놓지 않으면 아득한 전설로만 남을 것이고, 시루섬의 생존자들은 10년 후면 돌아가시고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다. 시루섬의 기적을 가감없이 기록해 남겨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2014년부터 움직였다.”

- 시루섬은 어떤 곳이었나

“양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소나무가 많았다. 매우 아름다워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가 됐다. 시루섬은 떡시루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시루섬은 수해 때 물에 잠겼고, 후에 충주댐 건설시 구단양 전체가 수몰되면서 마을이 없어졌다. 그대로 있다면 유명 관광지가 됐을 것이다. 사람은 살지 않아도 섬은 보존했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다. 주민들을 살린 물탱크도 없어졌다. 수해가 나던 당시 주민수는 자료집마다 다르다. 섬에 있던 잠업센터에 외지에서 연수받으러 온 여성 교육생들이 있었고, 외부에 나가있던 사람도 있었다. 단양군은 이 곳 잠업센터에서 누에 키우는 교육을 했다. 나는 여러 자료를 참고해 242명으로 봤다. 마을 가구수는 38가구였고 김·이·오씨가 많이 살았다.”

- 1972년 8월 시루섬 수해 상황에 대해 말해달라

“당시 수해 상황에 대해서는 언론에 많이 보도됐다. 나는 중학교 3년생으로 단양에서 버스타고 제천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물난리 때문에 기차와 버스가 다 끊겨 걸어서 귀가했다. 폭우는 태풍 ‘베티’ 영향이 컸다. 1938년 병자년 수해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당시 8월 17일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남한강이 불어 단양으로 밀려들었다. 18~19일에도 계속해서 장대비가 내렸다. 강물이 급작스럽게 불어났고 19일 오후1시부터 시루섬 집들이 강물에 휩쓸려갔다. 마을 이장과 반장이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알렸다. 오후2시에 사람들이 물탱크 주변에 모였고 탱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쪽에서는 탱크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대피용 원두막과 비상 가교를 만들었다. 청년들은 물탱크 맨 가장자리에 서서 스크럼을 짜고 노약자와 외지인들을 가운데로 보내 보호했다. 밤 12시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너지며 제2원두막을 쓰러뜨리자 사람들 수십명이 강물로 빠졌다. 최옥희 님이 안고 있던 백일된 아기는 물탱크가 기울면서 인파에 밀려 물탱크 입구 주둥이 부분에 머리를 부딪혔다. 이 사고로 아기는 사망했다. 그럼에도 최옥희 님은 다른 사람들이 동요할까봐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울었다. 다음 날 오전2시에는 섬 안팎 다섯군데서 힘내라며 시루섬을 향해 횃불을 들었다. 횃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오전5시 물이 빠지자 물탱크와 무너지지 않은 원두막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 총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어 이 날 오전9시에 태종학 충북도지사가 헬리콥터로 시루섬에 도착해 주민들을 만났고, 오전11시에는 미군 헬리콥터 2대가 주민들을 단양여중 수재민 임시보호소로 이송했다고 한다. 김 군수는 자료집에 이렇게 자세한 상황일지를 담았다.

 

'시루섬의 기적'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 김 군수 사무실에 놓여있다. 아직 작품을 걸지 못한 상태다.
'시루섬의 기적'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 김 군수 사무실에 놓여있다. 아직 작품을 걸지 못한 상태다.

 

- 김 군수는 이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9개 팀을 영웅으로 꼽았다. 아기가 죽었어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의연하게 버틴 최옥희 님, 남을 돕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해 아이 셋을 잃은 김현수 님, 외지인들 죽으면 안된다며 가장 먼저 잠업센터 연수생을 물탱크로 올라가게 한 마을 어르신들, 물탱크에서 스크럼을 짠 청년들, 원두막을 지은 사람들, 밤새 횃불을 밝힌 이웃 주민들 등이다.”

- 그동안 시루섬의 생존자 몇 명을 만났는가

“주민 13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 중 지금 경기도 용인시에 거주하는 최옥희 님은 처음에 거절했으나 나중에 간곡하게 부탁하자 청을 들어줬다. 아기 생각에 지금도 눈물짓고 사는 분을 염치불구하고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 그 분은 단양군에서 군민대상을 주려 했으나 ‘잘한 게 없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꼿꼿한 분이다. 싸늘하게 식은 아기를 밤새 안고 혼자 흐느낀 얘기를 듣고 정말 가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절절한 얘기도 마찬가지로 아프게 들렸다.”

김 군수는 얼마전에 했던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기념 행사 때 최옥희 님과 생존자들을 초청했다. 이들은 마을이 수몰되는 바람에 지금 모두 흩어져 산다. 그래서 얼굴도 자주 못본다고 한다. 이 날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 하면서 당시의 아픔을 공유했다는 후문이다.

- 50주년 행사는 잘 마무리 됐나

“생존자들이 배를 타고 시루섬을 둘러보고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천도제, 합동 생일잔치, 생존자 영상증언, 영웅 호칭 헌정, 희망의 횃불 점화, 김영환 충북도지사의 헌시 낭독 등으로 행사를 알차게 꾸몄다. 많은 언론매체가 보도해 단양군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 시루섬의 기적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단양군은 인구 3만명도 안되는 초미니 군으로 소멸위기를 겪고 있다. 군민들이 돌똘뭉쳐도 모자라는 판에 곳곳에서 갈등 현상이 나타난다. 군민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갈려 서로 반목한다. 그래서 나는 시루섬 사람들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하고 싶다. 서양에 ‘타이타닉 정신’이 있다면 단양에는 ‘시루섬 정신’이 있다. 남을 배려하고 단합하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천도제 후
'시루섬의 기적 50주년' 천도제 후. 한복입은 분이 최옥희 님. 그 옆이 김문근 군수 

 

김문근 단양군수는 누구인가 

1957년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에서 출생해 제천고·한국방송대 및 충북대 행정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1980년 공직에 입문해 단양군에서 지방공무원을 시작했다. 이후 1989년 충북도로 전입해 바이오과장·경제과장·총무과장을 역임하고 단양군 부군수를 지냈다. 충북도 농정국장을 역임하고 2016년 퇴임했다.

김 군수는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국민의힘 당내 공천을 신청했으나 국민의힘 충북도당이 류한우 당시 군수를 단수공천하자 김광표 예비후보와 함께 강하게 반발했다. 김 군수는 중앙당에 재심을 신청했고, 재심을 받아들인 중앙당은 경선을 실시했다. 경선 결과 김 군수는 현직 류 군수를 누르고 공천을 받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는 본선에서도 승리해 지난 7월 1일 군수로 취임했다.

 

'시루섬의 기적' 관련 작품을 설명하는 김 군수
'시루섬의 기적' 관련 작품을 설명하는 김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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