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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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최용환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10.12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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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정의 논쟁 :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2)

 

전회에서 : 롤즈는 ≪정의론≫에서 자신의 능력·재산·지위·성향·운수 등을 모르는 상태(무지의 장막)에서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분배의 원칙이 가장 정의로운 원칙이라고 주장합니다.

 

롤즈(John Rawls)는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될 정의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 보편적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평등한 자유의 원칙)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의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만 허용된다. (a) 그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지위와 직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기회균등의 원칙), (b) 그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차등의 원칙). 그리고 1원칙은 2원칙에 우선하고, (a)원칙은 (b)원칙에 우선한다. 즉 두번째 원칙을 고려하기 전에 우선 첫번째 원칙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즈의 정의의 원칙에서의 핵심은 차등의 원칙입니다. 누군가 어떠한 정책을 내세울 때, 전체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거나 모두에게 균일하게 이익이 배분된다고, 또는 불우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이익이 더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롤즈에 따르면 오직 불우한 계층에게 최대의 이익이 될 때만 그 정책은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롤즈의 전제와 결론에 대하여는 그동안 많은 비판이 있어왔습니다. 롤즈의 무지의 장막 하에서 선택을 한다면, 평균적인 참여자에게 유리한 원칙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롤즈는 특이하게도 합리적이라면 평균이 아니라 가장 불우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시점에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그가 전제하고 있는 원초적 상황이 사실은 원초적이지 않다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즉 롤즈가 백지 상태의 참여자가 아니라, 극도의 위험회피 성향을 갖거나 도덕심과 동정심이 투철한 참여자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롤즈의 결론이 정책적으로 현실적 효과를 갖기에는 너무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불우한 계층에 최대의 이익이 되는 것은 어떠한 정책인가? 보수와 진보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정책이 불우한 계층에게 직접적 혹은 결과적으로(예컨대 당장은 아니지만 상당기간이 지나면’) 최대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양극단에 있는 학자들은 서로 롤즈의 정의 원칙이 자신들의 정의 원칙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재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공짜가 아니야!”

 

지금 제가 마시고 있는 음료수를, 바로 옆의 저보다 더 목이 마른 그러나 이를 구입할 돈이 없는 사람이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를 거절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지만, 이 음료수는 내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한 저의 냉혹한 처사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노직(Robert Nozick), 롤즈가 재화를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공짜처럼 취급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재화가 공짜로 주어진 것이라면 롤즈의 원칙처럼 분배되는 것이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화는 누군가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돈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구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화가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사회정의라는 명목으로 타인과 공유해야 하거나 자신보다 불우한 타인에게 배분되도록 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강·절도와 같은 범죄행위에 불과하다고 노직은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노직에게 정의란 무엇일까요? 노직은 정의를 소유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노직에게 정당한 소유는 1)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던 외부의 일부를 점유하거나, 2) 이전의 소유자로부터 정당하게 이전을 받거나, 3) 이러한 1)2)에서 부정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노직은 소유정의론에 입각하여, 소유권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만큼만의 최소국가(근대의 야경국가와 유사)만 정당할 뿐, 그 이상의 권력과 기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롤스식의 복지국가는 정당한 소유물을 빼앗고, 그 강탈한 몫만큼 의무 없는 자를 강제 노동케 하는 강도국가라고 말합니다.

 

개인들은 권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는 어느 인간이나 집단도 이 권리들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이 권리들은 매우 강력하며 폭넓은 것이므로, 국가나 관료들이 무엇을 할 권리가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권리를 가진 자가 개인들이라면 국가에는 얼마의 여지가 남는가?국가에 대한 주된 결론은 첫째 강압 절도 사기로부터의 보호, 계약 집행 과 같은 좁은 기능들에 제한된 최소국가만이 정당화되며, 둘째 그 이상의 포괄(확장)국가는 특정의 것을 하도록 강제되지 않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국가는 일부 시민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할 목적으로, 또는 시민들 자신의 선()과 보호를 위해 특정행위를 금지할 의도로 강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소유의 역사와 현실은 정의로운가?

 

그렇다면 노직의 정의가 과연 불편부당하게 정의로울까요? 사실 노직의 결론은 근대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주장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소유의 정당성 근거로 노동을 내세웁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숲에서 열매를 따거나 울타리를 치고 경작을 하는 등 이 세상을 쓸모 있게 사용키 위해 자신의 노동을 가미하면, 그 열매와 토지는 그의 소유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로크가 땀 흘려 일해서 얻은 것은 그의 소유다라는 인류사회의 보편적 도덕률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노동과 소유는 철저히 근대 유럽 유산자 계급의 인식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노예와 노동자의 노동 결과물은 그가 아닌 그의 주인의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근대 유럽적인 방법으로 대지를 구분 점유하지 않고 제대로 경작하지 않기에 대지 소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최용환 공증인(변호사)
최용환 공증인(변호사)

이러한 한계는 노직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노직의 정의관은 소유질서가 정의롭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는 최초의 정당한 재산 취득과 그 이후의 자발적인 교환이 지속되는 역사를 상정합니다. 그러나 실제 소유의 획득·이전의 역사와 현실은 그만큼 정당하지도, 자발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광대한 토지를 점령한 것과 같은 수많은 강탈의 역사와 불합리한 고용관계라도 생존으로 강제될 수밖에 없는 자발적이지 못한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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