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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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정의’인가?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10.1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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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정의 논쟁 :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3)

 

전회에서 : 롤즈는 무지의 장막하에 선택하는 분배 원칙이, 노직은 개인간의 자유로운 소유 질서에 입각한 원칙이 가장 정의롭다고 주장합니다.

 

1980년대 들어 롤즈(John Rawls)의 자유주의와 노직(Robert Nozick)의 자유지상주의를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샌덜(Michael Sandel)입니다. 이들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즈나 노직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체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인간이란 자유주의자들이 상정하듯 하늘에서 떨어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의 가치관·도덕·예절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따라서 사회정의도 롤즈나 노직과 같이 가상적 상황이나 추상적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의 공동선이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상황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연고적·상황적 자아(encumbered·situated self)’에 대하여 샌덜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의가 제일 덕목이 되려면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피조물이어야만 하고,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상황들과 관련된다.내 정체성의 윤곽은 여러 방식으로 개방되고 수정되지만, 전적으로 모양 없는 것이 아니다.이 우연성이 도덕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지금의 정체성 때문에 나는 저런 목적보다 이런 목적을 긍정하고, 이런 방식보다 저런 방식에 눈을 돌린다.자유주의는 자아와 목적의 거리 두기에 대한 존경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거리를 너무 완벽하게 확보하려 할 경우, 자유주의는 그 자체의 통찰을 위태롭게 한다. 자아를 정치의 영역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인간 행위능력을 지속적인 주의와 관심의 대상보다 신앙의 항목으로, 불안정한 달성보다 정치의 약속으로 넘긴다. - 샌덜의 정의의 한계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는 존재가 아니야!”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의 정치적·정책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1970년대 대두한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철학은 롤즈식의 자유주의에 대하여 자유의 부족을 비판했지만, 이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지상주의 철학자들과 정반대로, 롤즈식의 자유주의는 자유의 과잉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현대사회의 제 문제가 개인주의와 가치중립성 등에 입각한 자유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샌덜은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현대 미국에 있었던 추상적인 자유와 평등 원칙에 입각한 많은 진보적인 정책이나 판결에 대하여 비판하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불만스런 민주주의를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그 대안으로 시민들이 각각의 공동체 특유의 전통·가치관·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나서서 그러한 윤리규범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적극 교육하고 권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스위프트(Adam Swift)는 ≪정치의 생각≫에서, 공동체주의는 완벽한 잡탕이라고 표현하며, 이는 여느 정의 원칙들과 비교하여 보아도, 유난히 여러 주의와 주장들이 뒤섞여 그 정체를 알기 어렵다고 꼬집었습니다. 롤즈의 자유주의가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노직의 자유지상주의가 17세기의 로크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면, 공동체주의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조화와 중용이라는 미덕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해소 곤란하고 심지어 때론 배타적이기까지 한 것의 뒤섞임이라는 문제가 현대의 공동체주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할 것입니다.

 

필자가 보기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공동체주의가 때론 너무 싱겁고 때론 너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공동체 의식을 부식시키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을 비난하면서도, 그것을 배양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에 대한 사회경제적 해결책을 내놓거나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비난과 교의는 화려하나, 대안과 그것을 위한 실천적 프로그램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정의를 소유와 분배 중심으로 접근한 롤즈와 노직의 정의론은, 공동체주의자들보다는 문제의 핵심에 다가서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내 정치적 극우보수파,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백인인종주의자들도 공동체주의자들과 유사한 주장을 합니다. 과거 극우보수세력들은 자유·사회적 다원성·소수자·비주류 문화 등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민족·국익·국격 등을 외쳤는데, 이제 그들은공동체라는 보다 세련된 용어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는 가능할까?

 

15소년 표류기(원제는 2년간의 휴가)≫에서 원초적 평등상태에 처한 15명의 소년들은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의 원칙을 보다 손쉽게 세울 것이고, 그것은 대체로 지금보다는 평등주의적이거나 적어도 타인을 적극 배려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이념적 성향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우리들은, 공동의 정의원칙을 쉽게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각자의 이익과 생각이 반영되어야 한다며 싸울 것이고, 가사 공동의 정의원칙이 세워지더라도 각자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끈임 없는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롤즈, 노직, 샌덜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롤즈는 이념적·계급적 당파성의 오염을 벗겨낸 가상적 설계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샌덜은 추상적이고 단일한 정의원칙이 아닌 각각의 공동체마다의 정의를 주장하고, 노직은 특정 정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구성하고 각자가 마음에 드는 공동체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정의로운 세상(유토피아 혹은 메타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롤즈의 자유주의(Liberalism), 노직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샌덜의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정의 원칙 중 어느 것이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나요?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그리고 그 정의 원칙에 비추어 지금의 현실은 정의로운가요? 여러분의 가족·동료·이웃도 당신의 정의 원칙에 동의를 할까요? 나아가 우리 5천만 국민 혹은 전세계 인류가 동의하는 정의 원칙을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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