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고인쇄박물관, 故 박병선 박사 업적 과대포장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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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고인쇄박물관, 故 박병선 박사 업적 과대포장 ‘논란’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2.10.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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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측 “박병선,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구석에서 잠자던 직지 발견”

전문가들 “여러 자료에 직지 나와 있어, 금속활자본 고증도 학자들이”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특별전 일부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특별전 일부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았다. 박물관 측은 개관 30주년 특별전 ‘박물관, 흥덕사지 위에 서다’를 오는 11월 6일까지 연다. 그런데 이 전시회에서 故 박병선 박사를 지나치게 우상화해 비판을 받고 있다. 박물관 측은 전시장에 “직지는 백운화상이 편집하고 저술하여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책입니다. (중략) 박병선 박사는 도서관 구석에서 잠자던 직지를 찾아내어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LE LIVRE:책>전시에 출품, 다시 세상에 직지를 공개하였습니다”라는 글귀를 게재했다.

또 한 쪽에 “직지는 초대 주한 프랑스공사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한 것입니다. 그러다 1911년 앙리 베베르가 파리 드루오 경매에서 직지를 구입하였고, 1952년 그의 유언에 따라 직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습니다. 기증 후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직지는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발견돼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라고 써 붙였다. 박 박사의 일대기에는 ‘1972년 5월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LE LIVRE: 책> 전시회에 직지를 전시해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공식 인정받음, 국제동양학 학자대회에서 직지가 금속활자로 인쇄됐음을 발표, 직지 촬영 필름을 국내로 반입해 영인본으로 공개’라고 적었다.

하지만 박 박사의 업적에 대해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돼왔다. 전문가들은 직지를 혼자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 금속활자라는 사실도 혼자 고증했다고 보기에는 과장된 면이 있어 ‘직지 대모(代母)’라는 표현은 불편하다고 지적해 왔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들이 ‘직지 대모’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고인쇄박물관의 책임이 크다. 박물관 측은 여러 간행물과 전시물에서 박 박사를 과대포장 해왔다.

박 박사는 지난 2005년 9월 흥덕사지 발굴 20주년기념 학술회의에서 “나는 1967년부터 1980년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도서의 해'로 정하고 같은 해 '제29회 동양학대회'가 파리에서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도서관에서 '동양학보물 책'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 때 한국코너를 담당했던 나는 한국고서를 물색하던 중 구석에 끼어 있던 직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지 마지막 장에 1377년에 인쇄했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무턱대고 믿을 수 없어 고증에 매달렸다. 지우개, 감자, 점토로 실험을 해서 활자로 찍은 인쇄본임을 확인했다. 나는 1972년 책 전시회에 직지를 금속활자본으로 출품했고, 그 해에 있었던 국제동양학대회에서도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직지의 존재는 이미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쓴 ‘한국서지’ 부록에 나와 있었다. ‘한국서지’는 꾸랑이 한국의 책을 소개한 책이다. 아울러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최 책 전시회에 직지를 출품한 사람도 당시 셰귀 동양문헌실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 박사는 정규직원이 아닌 연구원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서지학이 아닌 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서지학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특별전 일부
청주고인쇄박물관 개관 30주년 특별전 일부

 

전문가들의 증언
 

더욱이 박 박사는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주최 <LE LIVRE: 책> 전시회와 동양학대회가 같은 해에 열렸다고 말하나 동양학대회는 이듬해에 있었다.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은 1973년 6월 23일자 신문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이번 7월에 동양학대회를 계기로 동양의 財寶展을 마련했다”고 썼다. 이 때는 이미 국내 서지학자들이 직지가 금속활자본이라는 고증을 끝낸 뒤라고 한다.

남윤성 전 청주MBC 편성제작국장은 “2006년 ‘직지의 최초 발견자 콜랭 드 플랑시’ 취재 당시 콜랭 드 플랑시와 모리스 꾸랑의 전문 연구자이자 한국학 학자인 다니엘 부셰 박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경매시장에서 직지가 앙리 베베르에게 팔려 나간 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은 뒤늦게 직지의 세계사적 가치를 알았다. 도서관장이 세 번이나 앙리 베베르에게 찾아가 팔거나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사후에 기증하겠다고 했고 그의 재산 상속자가 약속을 지켰다’”는 중요한 얘기를 전했다.

그는 또 “다니엘 부셰로부터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먼저 박 박사한테 1972년 책 전시회에 직지 출품을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남 전 국장은  "여러 차례의 직지 다큐를 제작하면서 관련 학자 및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직지의 가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구석에 방치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 박사의 과대포장은 역사왜곡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정하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직지는 이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전시된 바 있었고, 1901년에는 모리스 꾸랑이 ‘한국서지’ 부록 3738번에서 소개했다. 그리고 앙리 베베르의 상속자가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했을 때 도서관은 ‘한국자료 109번’이라고 도서대장에 기록했고, 직지 표지에도 썼다. 이 정도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박 박사가 도서관 구석에서 찾아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또 “1972년 셰귀 파리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장으로부터 직지가 전시된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신용석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은 직지 기사를 써서 국내외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는 이 때 박 박사가 아닌 셰귀를 인터뷰를 했고, 전시회 도록에도 셰귀 이름만 올라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박 박사의 말과 여러 전문가들의 말이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 박사의 공로는 1972년 직지 영인판을 가지고 한국에 온 것이다. 80장의 원본 크기 사진을 가지고 와 국내 서지학자들이 연구토록 발판을 놓았다. 천혜봉 전 교수는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흑백사진으로 찍어와 국회도서관장에게 사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예산이 없어 청와대에 얘기했다. 그러자 문공부장관은 그 사진을 문화재관리국으로 넘겼고, 서지학회는 여러차례 만나 토론을 했다. 거기서 금속활자본이라는 결론을 냈고 내가 대표로 해제를 썼다”고 논문에 쓴 바 있다.

황 총장은 “박 박사가 혼자 고증했으면 논문을 남겼어야 한다. 여러 서지학자들과 故 김영진 전 청주대 교수가 이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박 박사는 직지와 관련한 연구논문을 발표하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된다”고 잘라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공기관인 고인쇄박물관이 기록물을 남길 때는 치밀한 연구조사와 전문가의 증언을 거쳐 사실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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