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낭성, 하림궁은 충주 탄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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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낭성, 하림궁은 충주 탄금대”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2.12.01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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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문화학술회의 공통 의견…예성문화연구회‧교통대박물관 공동 주최
‘신라의 북방진출과 낭성(娘城)’이란 주제로 열린 제33회 중원문화학술회의 토론회 모습.

[충청리뷰_김천수 기자]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유물 유적이 공존하면서 충주는 중원문화의 중심지로 지칭 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신라 하림궁(河臨宮)의 위치 비정(比定) 등의 문제가 학술회의를 통해 공론화 됐다.

지난달 25일 오후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국제회의실에서는 ‘신라의 북방진출과 낭성(娘城)’ 제하의 중원문화학술회의가 개최돼 지역 학계 등의 관심을 끌었다. 청주 낭성과 관련돼 더욱 주목됐다. 이날 행사는 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가 열어 온 33번째 중원문화학술회의로써 특별히 국립한국교통대학교 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됐다.

5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학술회의에선 △신라의 국원성 경략과 낭성 소재지(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진흥왕대 신라의 북방진출로 고찰(전덕제 단국대학교 교수) △신라의 한강 유역 점유와 국원(서영교 중원대학교 교수) △6세기 신라의 충주 진출과 낭성(홍성화 교수) 등 4편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사학계 중진들의 이날 발표 자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사료와 관련 논문, 자신들의 견해 등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주제 발표에 이어 길경택 예성문화연구회 회장이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최관호, 한국교통대박물관 오강석, 충주박물관 윤병엽, 예성문화연구회 정재성 씨가 각각 참여해 자신들의 견해와 질문을 내놨다. 이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과 토론 및 방청객과의 질의응답도 이어졌다. 이보다 앞서 길경택 회장의 대회사와 장효민 교통대박물관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전문가들, 5시간 열띤 토론

이와 같이 진행되면서 발표된 자료와 발언을 종합하면 신라의 낭성인 하림궁은 한강을 접하고 토성이 발견된 충주의 탄금대 부근이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은 551년 3월 낭성에 순수(巡狩)했다. 자료 인용에서 “3월에 왕이 순수하다가 낭성에 행차하여 우륵(于勒)과 그 제자인 이문(尼文)이 악(樂)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그를 불렀다”고 밝혔다. 우륵이 충주에 가장 오래 거주했고 하림궁의 명칭에서 수변(水邊)을 떼어 놓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낭성은 충주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순수는 왕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로 순행(巡幸)과 같은 뜻이다.

낭성과 하림궁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하나로 검색된다. ‘신라시대 남한강변에 있었던 별궁(別宮)’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진흥왕이 충주 방면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적 성격의 별궁이다. 이와 비슷한 별궁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551년(진흥왕 12) 3월 진흥왕은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군사작전을 감행할 목적으로 충주 방면을 순수하다가 마침내 낭성에 이르렀다. 이때 가야 출신의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에 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머물던 하림궁으로 불러들여서 가야금을 연주하도록 했다.

당시 우륵은 충주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림궁의 위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정약용은 「변진별고(弁辰別考)」에서 하림궁을 안동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청주 지역인 낭성 부근이거나, 아니면 우륵이 살고 있었던 충주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보는 쪽이 옳다.

진흥왕이 낭성에 머물렀다는 측면을 강조하면 자연히 하림궁은 청주 방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륵 일행이 충주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 하림이 바로 앞에 큰 강을 두고 있는 데서 붙여진 명칭임을 고려하면 남한강을 끼고 있는 충주 쪽이 설득력을 갖는다. 대체로 후자를 받아들이는 쪽이 다수이다. 가야금의 곡조에는 크게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의 두 가지가 있다. 하림조는 하림궁에서 연유한 것이 확실하므로 우륵이 비교적 장기간 거주한 충주 방면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다.

“탄금대 토성, 하림궁 유력”

이와 같이 밝히고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은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가 집필했다. 참고문헌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신라 5경의 설치와 서원소경」 (양기석 외,『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2001), 「신라소경고」 (임병태, 『역사학보』 35·36,1967) 이다.

길 회장은 학술회의 자료를 통해 삼국의 문화를 모두 경험한 충주에는 백제 고구려를 거쳐 신라 문화가 가장 많이 깔려있는데 이는 우륵과 이문의 충주 진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봤다. 진흥왕이 낭성에 순수하여 하림궁에서 우륵의 가얏고 소리를 들었던 것이 그 시발점이란 것.

길 회장은 “이 같은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당연히 낭성이 충주라고 생각하였는데 청주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며 “이러한 문제를 이제는 조금 더 확실히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대회사를 통해 밝혔다. 그는 “다음에는 이번 학술회의를 기반으로 실증적인 유물이나 유적으로 확인하면서 낭성과 하림궁의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짚어볼 계획이다”라고 관련 학술회의를 이어갈 뜻을 공표했다.

장효민 교통대박물관장은 “교통대 박물관도 12회에 걸친 학술 포럼을 통해 중원문화 정립과 발전을 위해 매진해 왔다”면서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신라의 북방 진출과정과 그 경로를 규명하고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낭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학술회의장에는 예성문화연구회 발족 초기부터 관여한 김현길 교통대 명예교수와 장준식 국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및 백인욱 중원문화재단 이사장, 김상석 우리한글박물관 관장, 유진태 충주문화원 부원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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