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우토로의 승리…동포들의 ‘작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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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토로의 승리…동포들의 ‘작은 통일’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2.12.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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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차별, 한국의 기민정책 딛고 공동체 지켜
소송 패소 불구, NGO‧노무현 정부 지원 땅 매입

김수환 우토로 평화기념관 부관장

이 기사는 사단법인 희망래일(이사장 이철)대륙학교커리큘럼 중 1118~20, <일본 조선학교 공개수업 견학 및 우토로 평화기념관 방문>을 동행 취재해 작성했습니다.

평화기념관 2층 전시실에서 전시자료를 설명하는 김수환 부관장. 사진=이재표
평화기념관 2층 전시실에서 전시자료를 설명하는 김수환 부관장. 사진=이재표

우토로 평화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초입은 비좁았다. 버스가 좌회전하지 못하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동안 철모까지 쓴 자위대 병력 서넛이 기웃거렸다. 마을은 자위대 기지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버스는 후진으로 간신히 현장을 벗어난 뒤 다른 경로를 통해서야 기념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우토로에서 살아가리, 우토로에서 만나리라고 쓴 걸개가 걸려있었다.

교포 3세인 김수환(47) ‘우토로 평화기념관부관장이 우리를 맞았다. 그의 입에서 기민정책(棄民政策)’이라는 말이 나왔다. 국민을 버리는 정책이라니, 끔찍한 표현이다. “일본은 우리를 차별했고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 우토로 동포들에게 기민의 역사는 그만큼 모질고 끈질겼다.


30년 전까지 상수도도 없어

우토로 마을에 있는 평화기념관은 2022년 4월 30일 개관했다. 사진=이재표
우토로 마을에 있는 평화기념관은 2022년 4월 30일 개관했다. 사진=이재표

우토로(ウト口)는 일본 교토부 우지시(京都府 宇治市)에 있는 마을이다. 김수환 부관장은 강제징용이 전부가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고혈을 빨았고 일본인들이 들어온 만큼 조선인들은 유민이 되어 해외로 떠돌았다며 조선 디아스포라를 정의했다.

1942년에는 우토로에 군 비행장을 만든다며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2000명 중에 1300명이 조선인이었다. 조선인들은 국민징용령에 따라 끌려오거나 여기서 일하면 더는 징용이 없다는 말에 속아서 노역을 선택한 빈곤층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공사는 중단됐고, 조선인들은 역사와 함께 박제됐다. 조선인들은 비행장을 짓던 시절, 함바(はんば, 飯場)에 살았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세 평 짜리 방, 열두 칸을 들인 양철집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은 내리 함바에 살았다.

보상은커녕 그동안 일한 임금조차 받지 못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철저히 소외됐고, 상수도는 1988년이 되어서야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수환 부관장은 상수도는 물론 하수도도 없었다. 주민들은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로 생활했고, 큰비가 오면 분뇨가 거리로 넘쳐 흘렀다고 전했다.

종전 후 자위대 소유였던 비행장 부지는 닛산을 거쳐서 1989, 부동산회사인 서일본식산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명도 소송으로 퇴거 위기에 내몰렸고, 함바를 강제 철거당하기도 했다.


우리를 버렸던 조국이 돌아와

기념관 앞마당에 보존해놓은 양철 함바집. 사진=이재표
기념관 앞마당에 보존해놓은 양철 함바집. 사진=이재표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교토부에 역사가 내팽개친 자이니치(재일 코리안) 마을이 있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일본인들이 공론화에 앞장섰고, 소송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한겨레신문과 MBC도 우토로의 현실을 보도했다.

주민들은 50년 가까이 살아온 실효적(實效的) 거주를 주장했지만 20006, 끝내 패소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이때부터다. 시민단체인 ‘KIN(Korean International Network, 지구촌동포연대)’을 시작으로, ‘아름다운재단등이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17억원을 모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11월에는 토지매입을 위한 지원금 30억 원이 대한민국 국회를 통과했다. 그동안 1,2대 상당수는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60여 가구에 100여 명 정도만 남았다. 그중에 80% 정도가 65세 이상 노령인구다.

김 부관장은 재판에서 패소했다면 일본인들의 상식으로는 이미 끝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해야 하느냐, 마느냐당위성을 따진다. 어르신들이 우리를 버렸던 조국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 이유다. ‘일본인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여기서 먼저 통일을 이루자며 단결했다. 분단된 조국의 작은 통일을 우리가 이뤘다고 자평했다.

현재 시영주택 두 동 가운데 한 동을 완성했고, 지난 430일에는 양국 시민들의 승리와 작은 통일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래에 전하기 위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개관했다. 조선학교를 나온 김수환 부관장은 2010년부터 우토로에서 시민 활동가로 일하면서 우토로의 역사를 쓰고 있다.

김 부관장은 “1년에 2000명이나 올까 했는데, 지난 10월까지 6개월 동안 무려 8000명이 기념관을 찾았다. 대부분이 일본인들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식민주의에 기반해 차별을 부추기고 있다. 나라가 하지 않는  인권과 평등 교육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투쟁 당시의 현수막과 시위에 쓴 사물. 사진=이재표
투쟁 당시의 현수막과 시위에 쓴 사물. 사진=이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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