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돌 대신 투표용지를 손에 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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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 대신 투표용지를 손에 쥔 노동자들?
  •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 승인 2022.12.16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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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슈타인, 로자, 레닌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논쟁 (2)

 

전회에서 :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있었던 베른슈타인 논쟁(수정주의 논쟁)은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낳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른슈타인의 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민주주의로, 로자·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은 공산주의로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현대 북유럽과 서유럽의 주류 정치노선 중 하나인 사회민주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 합당한 역사적 평가를 전혀 못 받아왔습니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있었던 베른슈타인과 로자 간의 논쟁은 그동안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만 조명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보면 로자의 명백한 한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민주주의 시각에서도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 이들 간의 논쟁 근원에도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현실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올바른 이행전략은 무엇인가,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에서 취할 수 있는 혹은 취해야 할 진보적 가치가 있는가, 현실의 민주주의 체제와 대비되는 미래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대안의 민주주의 모델에서 예상되는 민주주의의 부족과 결함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 둘은 서로 논쟁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고민에 대한 로자의 대답은 추상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실천적으로 성찰하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짧았습니다. 로자는 19191월 독일 패전의 혼란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도 없이 일으킨 봉기는 바로 진압되었고 로자는 극우파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마르크스만이 옳지는 않다

 

1백여 년의 일방적 조롱과 폄훼에서 벗어나, 베른슈타인의 이론과 신념을 대하는 개방적 태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재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만이 옳다는 교조적 신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류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때 범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계속 견지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반면에 진리의 중요성이 그것이 반사회주의 경제학자나 완전히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경제학자가 먼저 발견하거나 서술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이론과 신념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 채 서로 간에 자유로운 비판과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보다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이의 역사적 필연성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는 선험적·절대적 진리가 독선적·자기완결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이 아니라, 개방적·관용적인 전제에서 예정되지 않은 미래를 집단적·실천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커다란 정치적 결전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영역에서 노동운동이 거둔 전체적인 경제적, 정치적 승리의 결과로 온다.… 나는 사회주의가 카오스에서 생겨난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 사회주의 사회는 자유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의 조직적 창조물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적 민주주의의 창조물과 획득물이 결합됨으로써 온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우선이다

 

이러한 이론과 신념에 대한 그의 개방적 태도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발전합니다. 사실 말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사회주의로의 민주적·평화적 이행의 가능성을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보통선거권의 실현과 사회주의 정당의 성장을 보며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국가에서는 사회주의로의 비폭력적 이행이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한 국가 폭력기구(군인, 경찰)의 발달로 과거와 같은 노동자들의 바리케이트 투쟁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그 이상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현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진화의 최고형태로 사유합니다.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폐기되어야 하는 혹은 사회주의로 가는 수단임을 넘어, 오히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를 세계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주의는 시기적으로도 그것의 뒤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내용에서도 그것의 적법한 상속자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인성의 형성과 보장은 모든 사회주의적 수단의 목적이며… 실제로 자유주의 사상 가운데 사회주의 이념적 내용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 제도는 폐기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계속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투쟁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의 실현형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쟁취,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 기구들의 완성이 바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결국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그린 것입니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지난 세기 사회주의 실험은 명백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사회주의는 또다시 등장할 것입니다.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다시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까요? 베른슈타인의 주장대로 교조적 신념이 아닌 개방적 토론에서, 선험적 정의가 아닌 실천적 정의로부터, 소수의 음모가 아닌 대중적 참여와 지지에서, 혁명적 독재가 아닌 현실의 자유·민주적 토대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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