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활극 민주시장 오민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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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활극 민주시장 오민심 -2
  • 글: 이재표 삼화: 최나훈
  • 승인 2023.01.05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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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당첨제가 만든 민주주의 5대원칙

2030, 지방선거에서 시범 도입한 기초의회 의원 일부 추첨제로 당첨된 민주시의회 의원 열세 명은 이렇게 뽑혔다. 19세부터 70세 이상까지 모두 여섯 개 연령군에서 남녀를 각각 한 명씩 추첨한 뒤에, 연령대별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50대에서 남성 한 명을 더 추첨했다.

민주시의회 첫 20대 의원이 된 남성 당첨자는 편의점에서 주말 알바를 하는 중졸 학력의 무명 래퍼였다. 30대 여성 당첨자는 비혼 동거 중에 낳은 딸을 혼자 기르는 직장인이었다. 50대 남성 당첨자 중 한 명은 진보정당 소속으로 세 번이나 출마했다가 낙선한 현직 택시 기사였다. 그의 직업은 낙선할 때마다 바뀌었다.

여성 의원은 당선 여섯에, 당첨 여섯 명을 더해 이제 30%에 근접하게 됐다. 사실 남녀 반반양념 반 프라이드 반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민심 의원이 얘기하던 냄비 안의 국물과 숟가락의 국물맛은 아직도 괴리가 있었다.

그래도 당첨제 의원들의 소명 의식은 불타올랐다. 유권자의 1%인 추첨대상에 자원한 이들이었고, 0.18%의 확률을 뚫고 최종 당첨된 터였다. 오민심 의원의 불타는 사명감에 기름을 부은 건 남편이었다.

 

여보, 당선된 사람들한테 꿇릴 거 전혀 없어. 어차피 국력당이나 평민당이나 번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건데, 그 공천은 국회의원 눈에만 들면 되는 거잖아.”

그래도 그 사람들, 공천받으려고 당 활동도 오래 하고, 여기저기 봉사활동도 하고, 돈도 많이 번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그게 공천장에 줄을 선 거지, 유권자들에게 줄을 선 거냐고. 정치하면서 봉사한다는 사람들, 진정성부터 의심해봐야 해.”

? 그게 무슨 말이야? 다 그렇게들 말하잖아. 공직에서 쌓은 경험, 인맥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봉사하려면 봉사단체로 가야지. 왜 의회로 가고, 시장군수가 되느냐고. 정치는 봉사가 아니라 권력을 선용하는 거야.”

선용?”

착할 선에 쓸 용! 유권자가 준 권력이니까 유권자를 위해 제대로 쓰라는 얘기지.”

하기는 헌법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잖아.”

 

오민심 의원이 외는 헌법 조항은 이 한 줄이 유일했다. 14년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맞서 100만 촛불이 광화문에 모였을 때 그의 가족도 현장에 있었고 헌법 1조로 만든 노래를 주문처럼 부르고 외웠다. 참 오민심 의원의 남편은 정치외교학 전공이다.

당첨 후에 10대 의회가 개원하기 전까지 20여 일 동안 지역신문들은 추첨제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진짜 걱정이 되는지, 추첨제 도입이 좌초되기를 바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오합지졸, 민주시의회 기대 반 우려 반이라는 웃긴 제목은 그냥 우려 100%라고 쓰는 게 솔직했다. ‘상자 속의 낯선 쥐들끼리라는 사설은 정치적 훈련이 되지 않고 당의 통제도 받지 않는 당첨제 의원들은 좁은 상자 안에 갇힌 쥐들처럼 서로 싸울 것이라고 악담했다.

언론의 우려가 맞을지 틀릴지는 4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는 단 하루 만에 틀렸다는 게 입증됐다. 당선제 의원들은 만난 첫날부터 양당으로 갈라졌다. 덕담을 가장한 가시 돋친 말들이 오고 갔다.

이와 달리 당첨제 의원들끼리 첫 만남은 아주 잠시 어색했으나 곧 화기애애해졌다. 당첨제의 성공을 위해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머리를 맞대고 얘기해 보자고 했다. 누구의 제안이라기보다는 이구동성이었다.

연령대와 성별을 섞어서 세 조로 나뉘어 토론한 뒤 다시 전체가 모여 얘기한 끝에 마침내 다섯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이 다섯 가지가 훗날 민주시 민주주의 5대 원칙이 되리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당첨제끼리 또 다른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쉽사리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결론을 내려는 토론에 참여할 의지와 능력을 유지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을 칭찬한다.

충분히 토론한 뒤에는 다수의 결정에 따르는 의사결정 구조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토론하며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다.

 

*다음 호에 3화가 이어집니다.

당첨제 의원들의 다섯 가지 원칙은 영국 프롬 마을의 사례를 소개한 책 누구도 홀로 외롭게 병들지 않도록(2021·남해의 봄날)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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