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없는 자, 의무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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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없는 자, 의무 없는 일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3.01.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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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내 이름이 은밀한 명단에 올라가 있다면? 시절이 수상하니 께름칙한 생각부터 들 수도 있겠다. 요즘도 종종 블랙리스트(Blacklist)’살생부(殺生簿)’라는 단어가 인구에 회자하고 있으니 말이다.

블랙리스트라는 단어의 효시는 1660, 영국 왕 찰스 2세가 선왕을 처형한 청교도혁명 주역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명단이다. 아버지의 참수형을 지켜봤던 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린 이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크롬웰은 이미 3년 전에 병사했음에도 무덤에서 꺼내 목을 쳤고, 6m 장대에 머리가 걸렸다.

1504, 조선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다. 연산군은 생모 윤 씨의 폐비에 가담한 수십 명을 죽이고,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했다. 죽은 지 17년 만에 한 번 더 죽은 한명회는, 앞서 세조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계유정난(癸酉靖難) 살생부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도 암암리에 존재하는 현대의 블랙리스트나 살생부는 다행히도(?) 살해를 전제로 한 명단은 아니다. 대신 뒷조사 또는 은밀한 해고, 업무배제 등을 위한 명단으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1990년에는 군조직인 보안사에서 민간인 1300여 명을 사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등병 윤석양 씨에 의해 폭로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박근혜 정부 최고 실세였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명단을 설계하고 관리한 혐의로 구속됐다.

최근 충북이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시끄럽다. 충청북도교육청 산하 교원연수 기관인 단재교육연수원이 그 진원지다. 2월 말 명예퇴직을 앞둔 김상열 원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교육청이 일부 강사를 배제하려고 블랙리스트를 하달했다는 의혹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이 명단이 본청 장학사를 통해 연수원 부장에게 USB로 전달됐으며, 자신은 유령이고 허수아비 원장이라서 우리 강사로 배제된 분들의 명단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이 김병우 전 교육감의 최측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폭로의 순수성에 대해 트집을 잡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내부고발과 고자질은 구별해야 한다. 타인의 흠집을 밀고한 게 아니라, 32년 몸담은 조직과의 갈등, 심지어는 손가락질마저 감수한 외부 폭로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밝혀야 할 실체적 진실은 강의주제나 강사 선정과 관련해 윗선의 권한 없는 자가 하부 공무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는지 여부다. 현직 원장을 배제하려는 고의성이 있었다면 일이 더 커진다. 더불어 그 결과가 개인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위배한 정도에 대해서 따지면 된다.

현직 개방형 감사관이 전임 교육감이 뽑은 사람이라 자칫 편향된 감사가 우려되므로 부교육감 중심으로 감사반을 꾸리겠다는 교육청의 대응 방침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겠다. 걱정하지 마시라. 차라리 다행이다. 정의는 오직 진실이 살아있는 권력앞에 굴복할까, 염려할 뿐이다.

OECD 34개 나라 중에서 32개 나라는 감사원이 법원처럼 독립돼 있거나, 의회 소속이다. 안타깝게도 행정부 소속인 나라는 한국과 스위스뿐인데, 그나마도 스위스는 권한이 분산된 내각부 소속이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는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이 주인인 나라는 주민을 감시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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