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진아(眞我)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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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진아(眞我)를 품고 있다
  • 장인수 시인
  • 승인 2023.02.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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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씨를 뿌리면 씨앗을 부정하며 싹을 틔울 것

지금도 감각 충만한 생생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투산이 엄마가 일일교사가 되어 교실에 들어오셨다. 그때 엄마는 담배씨, 겨자씨, 채송화씨, 달맞이꽃씨를 가지고 와서 씨앗 구별하기와 발아에 대하여 수업을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들만 모아가지고 왔다.
 

 

엄마가 가지고 온 씨앗들은 모두 한 알의 크기가 채 0.2~0.6m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 가벼워 물에 담그면 둥둥 뜨기도 한다. 담배 씨앗과 달맞이꽃 씨앗과 채송화 씨앗도 서로 비슷해서 섞어놓으면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엄마 교사는 무척 촌스러워서 창피했지만 씨앗의 일생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는 수업에 학생들이 모두 매료가 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씨앗은 창조의 합창단이라고 수업을 하셨다. 씨앗은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품고있다고 얘기했다. 씨앗은 작은 품으로 드넓은 우주를 품고있다고도 얘기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라는 속담도 설명해 주셨다. 씻나락은 한해 농사가 끝나면 수확한 벼 중에서 튼실한 것을 골라서 내년의 종자로 쓰기 위해 남겨놓은 볍씨다.

씻나락은 보물 중의 보물이기에 곳간에 고이 간직한다. 그런데 씻나락을 까먹다니? 다음 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12살 때 나는 씻나락의 중요성을 정확히 알았다.

엄마는 씨앗 받기가 취미였다. 김을 매다가도, 풀을 뽑다가도 꽃씨를 받았다. 채송화 씨앗주머니를 톡 터추면 까만 생명들이 펑 터지듯이 쏟아진다. 요렇게 작은 씨앗 속에 그처럼 다양한 꽃색깔과 꽃향기가 입력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꽃씨는 그런 정보를 모두 기억해놓았다가 이듬해 봄에 기억의 회로를 활짝 열어 채송화를 피워낸다.

엄마는 수십 종류의 꽃씨를 받았다. 백일홍이 활짝 필 때는 햇빛이 불타던 여름이었고 작은 벌새처럼 생긴 꼬리박각시나방 서너 마리가 날아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꽃잎에 밀어 넣으며 꽃밭에서 살았다. 백일홍 꽃씨는 마른 꽃술 밑에 납작한 씨앗들이 숨어 있다. 활짝 편 부챗살처럼 붉고 실한 맨드라미 벼슬을 툭툭 치면 까만 씨앗이 우수수 떨어졌다. 백도라지와 청도라지 씨주머니를 흝어서 씨앗을 받았다. 손대면 톡하고 터지는 봉숭아 꽃씨를 받았다. 한 해가 지나 봄이 오면 꽃씨들은 사방에 뿌려지며 초가집을 꽃 궁궐로 만들었다.

충북 진천에는 보탑사라는 꽃절이 있다. 금강초롱, 무늬비비추, 술패랭이, 붓꽃, 상사화, 구절초, 하늘나리, 봉숭아, 맨드라미, 노루오줌, 송엽 등 얼추 백 가지가 넘는 꽃들이 절 안팎으로 가득 심어져 있다. 며느리뒤닦개라는 꽃 뒤에 돌부처가 앙증맞게 바위에 앉아 웃고 있었다. 계단과 마당에 핀 꽃들이 극락보전을 떠받들고 있었다. 꽃밭은 색깔의 군무이며, 범람이며, 은하수이며, 초신성이다.

꽃밭은 색깔의 현기증이며, 아제아제바라아제이며, 나무아미타불이다. 꽃은 세계 안에 있는 빛의 총량을 작게 쪼갠 것이다. 꽃은 그 쪼개진 것들의 퍼짐이다. 꽃씨 속에는 이런 꽃들의 만다라가 들어 있는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를 함께 품고 있다. 꽃은 염화미소였고, 헌화공덕이었다.

엄마는 평생 씨앗을 뿌렸고, 꽃을 피웠고, 열매를 땄다. 그리고 씨앗을 받았다. 받은 씨앗을 다시 뿌렸다. 나 또한 엄마의 성품을 이어받았다. 씨앗은 나에게 희망을 준다. 시골에는 토광이나 헛간에 온갖 씨앗을 담아놓은 페트병이 소복하다. 이제는 냉장고에도 씨앗이 담긴 페트병이 들어앉았다. 엄마와 내가 받아놓은 온갖 씨앗들이다.

씨앗은 순수성, 파괴성, 폭발성, 조화성을 지니고 있어서 싹이 되어 싹을 부정하면서 줄기가 되고, 줄기가 되어 줄기를 부정하면서 꽃봉우리가 된다. 단호하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해체하면서 더 승화된 아라한(阿羅漢)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래서 둥글고 작은 씨앗을 보면 진아(眞我)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

장인수 시인 

이제 2월이다. 논밭에 웃거름을 주고, 해토가 되면 논밭갈이를 할 것이다. 모종판에 온갖 씨를 뿌리고 심을 것이다. 꿈을 담는 틀인 씨앗은 꿈틀꿈틀 씨앗을 부정하면서 싹을 틔울 것이고, 삼라만상의 감각을 쇄신하고 갱신하면서 생기 약동할 것이다. ! 놀라워라! 씨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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