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리즈/ 왜 문화산수 구곡특별군 괴산군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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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리즈/ 왜 문화산수 구곡특별군 괴산군인가(2)
  • 김영이 기자
  • 승인 2023.02.1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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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구곡 9개 명칭은 유교사상 축약
고산구곡 고산정은 중국 사신 시문 만나는 충북 유일의 명소
갈은구곡 1~9곡은 명칭과 구곡시를 한자 서체로 바위에 새겨
산막이옛길 구역 연하구곡은 돈 때문에 진실을 왜곡··· 비난

 

 

연하구곡 제4곡 전탄과 6곡 무담 사이에 있는 유일한 마을 산막이 전경. 산막이 옛길 개발 전 군자산 중턱 수동대에서 이상주 박사 촬영(2001년 8월)
연하구곡 제4곡 전탄과 6곡 무담 사이에 있는 유일한 마을 산막이 전경. 산막이 옛길 개발 전 군자산 중턱 수동대에서 이상주 박사 촬영(2001년 8월)

 

괴산엔 독특한 유교문화자원이 많다. 그 자원이 바로 '문화산수 구곡문화관광특구'다.

잘 알려진 대로 괴산엔 전국에서 구곡이 가장 많다. 고산구곡, 갈은구곡, 연하구곡, 쌍곡구곡, 선유구곡, 화양구곡이 내로라하는 구곡 관광길이다. 그중 화양구곡은 한국 최고의 구곡, 제일의 문화산수를 자랑하는 구곡의 모태다.

고산구곡은 중국 사신들의 시문의 유교문화자원적 문화외교적 가치가 물씬 묻어나는 곳이다. 고산정은 중국 사신의 시문을 만나는 충북 유일의 명소다. 중국 사신과 문화외교의 달인 유근(1549~1627)은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 웅화, 양유년 등과 시문서화(詩文書畵)로 문화외교를 했는데 이 고산정에 이들 시문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화외교활약상을 선양하고 본받을 명소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고산구곡 4곡 은병암에 새겨진 중국 사신 주지번의 글씨 ‘은병’
고산구곡 4곡 은병암에 새겨진 중국 사신 주지번의 글씨 ‘은병’

 

고산구곡 4곡 은병암에는 충북 최장의 잔도(棧道)가 있다. 은병암에 새겨진 은병(隱屛)은 중국 사신 주지번의 글씨다. 은병암은 경사(40)가 심해 농토를 가려면 괴산읍 이탄리에서 가곡리 평지 길로 돌아서 가야 했다. 이 암벽 하단부에 만들어진 석잔도는 자연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산교육장 가치가 있다.

 

바위에 구곡시···한국 유일

 

대한민국에는 120여 개의 구곡이 있다. 갈은구곡만이 구곡 9개의 명칭과 9개 구곡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갈은구곡은 제1곡부터 9곡까지 구곡의 명칭과 구곡시를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한자 서체로 바위에 새겨 놓았다. 이런 사례는 한국 유일하다.

이상주 박사는 갈은구곡을 설정한 전덕호(1844~1923)는 화양구곡, 선유구곡, 연하구곡 등 인근에 있는 구곡에 글씨를 새겨놓은 사실을 온고지신 창의융합적으로 선용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갈은구곡애 새겨진 글씨는 다양한 한자 서체를 연구할 수 있는 특이한 사례로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구곡이자 문화유적이라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이렇듯 갈은구곡을 정한 전덕호는 유교문화를 창의융합적으로 활용했다. 창의융합교육학문의 근원은 유교문화다. 창의융합선진이 되려면 유교문화를 창의선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계 최초의 연하동문 탁본.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가 없다.  2001년 6월 가뭄이 극심할때 물이 빠지자 배를 타고 들어가 탁본을 떴다.
학계 최초의 연하동문 탁본.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가 없다. 2001년 6월 가뭄이 극심해져 물이 빠지자 이상주 박사가 배를 타고 들어가 탁본을 떴다.

 

연하구곡은 노성도(1819~1893)가 정했으며 지금의 산막이옛길 구역이다. 산막이옛길 입구 안내판에는 옛날과 옛정을 그리워하는 현대인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현대감각에 맞춰 산막이옛길이라고 명명했다고 적혀 있다.

연하구곡을 설정한 노성도는 그의 정치적·음악적 인식을 가사 여민락(與民樂 )을 통해 발현했다. 충북에 거주하는 인물이 창작한 가사를 발견하기는 흔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충북 사람이 창작한 가사가 충북에서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다.

 

탑바위가 각시바위?

 

그러나 연하구곡 제1곡 탑바위를 각시바위라 변용한 것은 억지다. 그 맞은편에 길을 만들고 각시와 신랑길이라고 명명한 것이 그것이다. 돈을 위해 진실을 왜곡 말살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 박사는 이에 대해 노성도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일갈하고 망세루 쉼터에 연하동문 탁본 복사본이라도 설치해 노성도의 연하구곡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쌍계구곡 내 떡바위 고인돌 사이에 새겨진 한국 유일의 복주머니 문양 암각화.
쌍계구곡 내 떡바위 고인돌 사이에 새겨진 한국 유일의 복주머니 문양 암각화.

 

쌍곡구곡은 진천 출신 정재응(1764~1822)이 선조 송강 정철(1536~1593)이 쌍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 뜻을 간파하고 자신이 그 뜻을 실현하고자 1811년 지금의 쌍곡으로 이사했다. 우암의 후손 송환기(1728~1807)에게 수학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조상의 좋은 뜻을 계승하고 스승의 학통을 계승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정재응은 후손으로서, 제자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쌍계구곡을 정하고 그 도를 계승한다는 뜻을 근차주선생도가운 십수(謹次朱先生櫂歌韻 十首)‘, 즉 쌍계구곡가에 담았다.

이 박사는 이렇듯 가문의 이상을 실현하고 스승의 학문을 온고지신해야 가문과 학계가 발전하고 나아가 사회 국가가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자승어부(子勝於父·아들이 아버지보다 나음), 청어람(靑於藍·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온고지신하면 도약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쌍곡구곡 떡바위 표면엔 북두칠성 7개 별자리를 지름 6정도로 판 원형의 홈이 새겨져 있다. 또 입석 표면에는 오늘날 농협 휘장 또는 복주머니 모양의 문양을 새겼다. 이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종교의식의 성지임을 엿보게 한다. 북두칠성 문양의 성혈과 복주머니 모양의 암각 문양은 2002년 이 박사가 발견, 학계에 처음 소개했다.

 

선유구곡과 이황은 무관

 

국립공원속리산사무소가 만든 선유구곡 안내문에는 선유구곡을 퇴계 이황이 정했다고 써 놓았다. 그러나 이는 1969년 김종륜이 집필한 괴산군지에 쓰인 내용을 검증없이 인용한 데서 빚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퇴계연보를 보면 이황은 명종 3(15481) 단양군수가 되어 5월 구담을 유람하고 11월 풍기군수가 되었다. 명종 14(1559) 3월 배를 타고 귀향하는 도중 구담에서 이지번, 단양군수 황준량과 함께 유람했다고 적혀 있다. 이황은 단양군수로 재직한 10개월 동안만 충북에 살았으며 만약 이황이 선유동에 9개월 머물렀다면 연보에 당연히 기술됐을 것이다. 이에 근거해 선유구곡과 이황은 관련이 없다고 이 박사는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선유구곡을 설정한 사람은 누군가. 김시찬(1700~1767), 이보상(1698~1775), 정술조(1711~1788), 이상간(1715~1765)1752년 정했고 선유구곡 제1곡의 선유동문이라는 글씨는 이보상이 썼으며, 9곡 은선암에 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녕(李寧·중종 91524~선조 1570년 이후 어느 시기)이 선유동에 선유팔경을 설정하고 신선처럼 살았다. 선유팔경시는 지금의 안동에 있던 이황이 이녕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것이다.

선생이 아닌 자연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산자수려한 화양구곡은 송시열(1607~1689), 권상하(1641~1721), 민진원(1664~1736)이 완성했다.

화양구곡은 매년 3.1절에 항일투쟁의지 결의 모의 대회가 열렸다. 제천 출신 의당 박세화(1834~1910)1904년 지금의 화양구곡에서 제자 등 200여 명의 유림들을 모아놓고 일본을 척결하자는 척왜의식(斥倭意識)을 강화하기 위한 화양강회(華陽講會)를 개최했다. 화양구곡이 조선말 일제에 맞선 국권수호와 국가수호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박세화의 존화양이의식과 화양강회, 그리고 화양강회일기의 내용은 그 시대적 문학적 의의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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