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영원으로 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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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 영원으로 가는 여정
  •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23.02.22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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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와 소설 ‘유정’을 쓴 춘원 이광수
바이칼 호수 울혼섬의 샤먼 바위
바이칼 호수 울혼섬의 샤먼 바위

 

한국인들에게 바이칼은 참 특별하다. 한동안 한민족은 바이칼에서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회자하기도 해서 알타이와 함께 시베리아에서 우리에겐 가장 친숙한 지역이다. 사실 한반도 3분의 1에 달하는 바이칼 호수의 영험한 모습은 한국인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대부분 사람에게는 언제나 신성시되어왔다. 사실 바이칼은 세계 최대의 담수호이니, 그 존재를 아는 순간 경외감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실제고 고고학자들이 바이칼 호수 일대를 발굴한 결과 빙하기가 끝난 1만여 년 전부터 바이칼 곳곳에 신석기시대부터 샤먼들의 무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특히 내 마음속에 남는 유물은 6000년 전 샤먼 무덤에서 발견된 뱀처럼 긴 꼬리를 가진 두 동물이 이끄는 유물이다. 그 기나긴 꼬리의 끝에는 사람의 머리가 붙어있으니, 피안으로 향하는 기나긴 샤먼의 여행을 바라며 넣어준 유물이다. 그 중 특히 바이칼 올혼섬에 있는 샤먼 바위는 지금도 강한 자기장으로 영적인 에너지가 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샤먼이 찾는 곳이다.

또한, 바이칼은 순결함 그 자체이다. 호수의 물은 차디차지만, 그냥 물을 먹어도 될 정도로 맑다. 바이칼 호수에서 잡은 담백한 물고기인 오물(민물 연어)을 모닥불에 구워서 보름달 밝은 밤에 호숫가에서 술잔에 어른거리는 달빛을 즐기며 보드카 한잔을 마시고 마시는 맛은 참 각별하다. 생수는 필요 없다. 그냥 바이칼의 물을 그냥 마시면 된다.

바이칼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세기 이후 유라시아 횡단 철도가 연결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바이칼은 우리에게는 서양으로 가는 길목이며, 세계로 가는 관문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1913년에 미국으로 여행하고자 장대한 포부를 품고 서울역을 출발하는 유라시아 철도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호수의 물은 차디차지만, 그냥 물을 먹어도 될 정도로 맑다. 바이칼 호수에서 잡은 민물 연어를 모닥불에 구워서, 보름달 밝은 밤에 술잔에 어른거리는 달빛을 즐기며 보드카 한잔을 마시고 마시는 맛은 참 각별하다.”

이광수의 여행은 중간 바이칼에서 멈추었다. 1차대전이 발발한 탓이다. 춘원 이광수에게 바이칼은 세상을 향한 포부의 시작인 동시에 유라시아로 향한 종착역인 셈이었다. 춘원은 자신의 경험을 유정이라는 소설로 녹여냈다. 유정의 화자 N은 최석을 이해하며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소회를 풀어낸다.

자신이 지도하는 남정임과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불륜으로 오해받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으며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이 바이칼에서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비극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많은 사람은 그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그 아름다운 바이칼을 기억한다. 최석과 그의 상대자였던 남정임은 약간의 시기를 달리하여 바이칼을 찾는다. 최석에게 바이칼은 세상의 모든 한을 묻는 무덤 같은 곳이었다.
 

- 1913년 이광수가 탄 시베리아 횡단 여정은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바이칼에서 멈췄다.
1913년 이광수가 탄 시베리아 횡단 여정은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바이칼에서 멈췄다.

 

춘원 이광수
춘원 이광수

 

이광수의 유정과 비슷한 이야기 포맷이 있으니 바로 2000년 전 한나라의 장수 이릉이었다. 그는 한무제 시절에 억울하게 전쟁의 패를 뒤집어쓰고 벌을 받는 것에 한을 품고 흉노로 귀의하여 바이칼 근처에 살았다. 그를 찾아온 사신 소무가 다시 귀의를 권해도 그는 오랑캐의 옷을 이미 입었다며 그 청을 거절한다. 최석과 마찬가지로 바이칼호 근처에서 오랑캐의 외투에 자신을 파묻은 것이었다.

바이칼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단순한 무덤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흉노의 장수가 된 이릉은 그 용맹함으로 흉노의 장군이 되었다. ‘유정의 주인공은 죽었지만, 그에 대한 오해는 풀렸고, 존경스러운 교육자로서의 그는 다시 부활했다. 바이칼의 샤먼 바위가 영험한 이유는 바로 치유였고, 죽은 영혼의 부활이었다.

시베리아라는 추운 땅에 있는 거대한 어머니의 품 같은 바이칼은 러시아인들에게도 부활의 공간이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결말인 자신이 버린 카츄샤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시베리아를 따라간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성경을 읽으며 구원받은 곳이 바로 바이칼 근처에 있는 이르쿠츠크였다. 이르쿠츠크는 19세기 초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러시아의 젊은 청년 장교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시베리아의 계몽자로 부활한 곳이었다. “부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누추하지만 미래에 대한 서광을 비추는 곳은 바로 바이칼인 셈이다.

바이칼에서 새로운 삶이 부활한 사람은 동양에도 있으니, 러시아의 전문가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가토 규조(1922~2016)였다. 그는 만주의 관동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시베리아에 포로로 끌려가서 5년을 살면서 러시아를 공부했고,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서 시베리아 역사를 소개하는 학자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평생 주요한 시베리아 관련된 책을 번역하고 또 연구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30년 전에 안암동의 헌책방에서 샀던 시베리아 홀린 사람들에서 처음 보았다. 이 작은 문고판 뒤에 실린 역자의 에필로그에는 간단한 바이칼의 경험이 실려있다.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태로 시베리아 철도의 짐칸에 실려서 정처 없이 가던 중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바이칼이다라고 소리치자 화차의 좁은 틈으로 눈부신 바이칼 호수의 은빛 아름다움에 도취하였고, 그렇게 한나절을 바이칼을 따라 기차는 따라갔다. 화차의 좁은 틈으로 터지듯 비친 호수의 은빛 파도는 그의 운명을 인도하는 이끄는 빛(guiding light)인 셈이다.

가토 규조는 한국에서 출생해서 일본으로 밀항해서 평생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죽기 전에 자신이 식민지 조선 출신임을 밝혔을 뿐이다. 일본 관동군의 포로로 구소련의 여러 역사를 사랑하던 가토 규조에게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이야기 자체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추운 시베리아 속의 바이칼이 국적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큰 호수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삶과 부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활과 영원의 역사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적어도 1만 년의 역사 간에 이어졌다. 어떤가? 막연히 바이칼은 한민족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는 바이칼의 그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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