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대몽항쟁전승기념탑, 이전이 해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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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대몽항쟁전승기념탑, 이전이 해답일까?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3.03.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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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곳서 9차례 항몽 전투…충주산성‧다인철소‧충주성‧미륵리‧박달재 등
충주 대몽항쟁전승기념탑 모습.
 

조길형 충주시장이 충주시 종민동 마즈막재 인근 계명산 초입에 세워져 있는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을 이전할 뜻을 밝힌 가운데 혜안책이 요구된다.

조 시장은 지난 22일 시정 기자간담회에서 해당 기념탑을 시청앞 광장 등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서 조 시장은 “기념탑이 시민들의 눈에 벗어난 곳에 위치해 존재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면서 ”시청앞 분수대 앞에 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도시나 중요한 기념물이 광장 등 시민들 곁에 있다”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될 수 있도록 금년에는 구체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곳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은 충주지역에서 9차례 치러진 대몽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충주시가 건립해 2003년 9월 24일 제막했다. 충주지역에서 치러진 전투 중 1253년 10월부터 70여 일간 이어진 ‘충주산성 전투’는 가장 치열하게 전개 된 끝에 승리해 몽고군의 경상도 진입을 막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기념탑 상층부에 ‘1253’을 크게 새긴 이유다.

이전 없이 목적 달성

그래서인지 이 기념탑이 ‘충주산성 전투’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거나, 충주에는 ‘충주산성 전투’ 기록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상황이다. 이번 조길형 시장의 해당 기념탑 이전 필요성 제기로 ‘충주산성’이 어디냐를 두고 논쟁이 재발할 조짐도 있다. 이전 필요성 언급이 조 시장의 업적 쌓기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보이고 있다.

건립에 앞서 충주시의회에선 기념탑 건립 장소 논란이 2년 가량 이어졌다. 회의록을 들여다 보면 이시종 지사 시절, 처음 탄금대 검토에서 호암지 부근, 충주남산 등을 검토하다가 이곳 마즈막재 정상의 계명산 제1등산로 초입에 세우게 됐다. 마즈막재 정상은 종댕이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멀리 산턱에 ‘충주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보인다. 주차장 앞쪽에 보이는 것은 충주시 무공수훈자 공정비이다.

이후의 이종배 전 시장은 몇몇 시의원들이 2012년 11월부터 해당 기념탑 주변의 주차장 확보 문제와 곁들여 이전 필요성을 묻자 ‘전문가들의 충주산성 위치 비정(比定) 의견이 나오면 이전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명확히 했다. 충주산성이 어디인지, 대림산성인지 덕주산성인지 학술적으로 명확해져야 이전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해석인 셈이다. 이번 조길형 시장의 이전 필요성 언급이 나오자 또다시 충주산성 위치 문제가 소환되고 있다.

그러나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의 위치는 충주산성의 위치와 불가분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해당 기념탑은 ‘충주산성 전투’만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장을 방문해 확인한 결과 기념탑 뒤편 좌우 날개에는 각각 탑의 건립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엘리베이터 등 설치도 가능

좌측면에선 “13세기 몽고제국의 집요한 침략전쟁에 대하여 고려 사람들이 치열한 항전을 벌였을 때, 이곳 충주는 가장 대표적인 싸움터였다. 1231년부터 약 30년 동안 역사 기록에 남겨진 것만 아홉 번의 커다란 싸움이 이곳 충주에서, 충주 사람들에 의하여 치러졌다. 충주성, 충주산성, 금당협, 다인철소, 대원령, 월악산성, 박달재 등은 당시의 전투지역으로 기록이 남겨진 곳들이다. 이러한 치열한 항전이 가능했던 것은 충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투철한 자주 민족의식과 애향정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800년 전 이땅의 선조들이 치렀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나라와 향토를 사랑했던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충주 시민들의 뜻을 모아 이 탑을 세운다“고 밝히고 있다.

우측면에는 앞서 언급된 충주산성 전투에서 김윤후 장군의 충주성민들을 향한 독려의 말과 전투 후의 내용 등이 좌측면 분량만큼 적혀 있다. ”만일 힘을 다해 적을 막는다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벼슬을 내리겠소. (중략) 싸움이 끝나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약속대로 신분에 관계없이 관직이 내려졌다. 이때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주사람들에 대한 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추가 상징물 도심에 세워야

비문에서 확인되었듯이 충주산성 전투만 벌어졌던 게 아니다. 이같은 기록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충주문화대전, 충주문화원이 발간한 ‘대몽항쟁과 충주산성 전투(소제 김윤후 장군과 충주사람들)’ 등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충주 대몽 전투는 △제1차 승전, 충주성 전투 △제2차 승전, 최수의 금당협 전투 △제3차 승전, 충주산성의 대몽항쟁 △제4차 승전, 다인철소민의 대몽항전 △제5차 승전, 충주산성 전투 △제6차 승전, 충주주성 전투 △제7차 승전, 월악산성 전투 △제8차 승전, 대원령 전투 △제9차 승전, 박달현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충주지역의 대몽 전투는 다양한 곳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전승탑 이전의 전제는 무리일 수 있다. 우선 검토할 것은 시민들의 대몽 항쟁 역사인식 제고측면에서 전승탑을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전승탑 인근의 △종댕이길 화장실 뒤쪽 부지 확보 후 주차장 확장 △전승탑 관람용 투명엘리베이터 설치 △전승탑 부지 내 전망대 설치 등이다. 현재의 전승탑을 보려면 106개의 계단을 오르거나, 가파른 길을 돌아 걸어야 하는 형편이다. 주차장 확장 시에 교통 안정을 위해 일대를 평면 광장화하고 안전건널목 설치도 필수적이다. 또한 쉬운 등산로 개설로 대림산성과의 접근성도 높여야 한다. 특히 도심에 추가적인 대몽항쟁 기념 상징물을 설치해 기존 전승탑이 있음을 알리는 등 연계해야 한다. 도심 일상 속에도 대몽항쟁 상징물을 접하고, 마즈막재 전승탑에서 충주 시내와 충주호를 바라보며 선현들의 희생정신을 새겨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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