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름들을 어찌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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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름들을 어찌 부를 수 있을까?
  • 이지상 가수
  • 승인 2023.03.15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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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만들면서 울었고, 그들을 호명하며 또 울어
모두 시베리아에 가지 않았다면 낯선 이름들이다. 노래를 만들면서 울었고 노래를 부르면서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래도 쉽게 부를 처지가 아니게 됐다. 독립된 나라에서 가장 빛나야 할 이 이름들을 어찌 부를 것인가.
모두 시베리아에 가지 않았다면 낯선 이름들이다. 노래를 만들면서 울었고 노래를 부르면서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래도 쉽게 부를 처지가 아니게 됐다. 독립된 나라에서 가장 빛나야 할 이 이름들을 어찌 부를 것인가.

넷플릭스 연작 드라마 더 글로리9, 2110초 부터 나오는 대사는 이렇다.

니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 니 인생이 나 땜에 지옥 이라구?. ~ 지랄 하지마. 니 인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이었잖아. 넌 외려 나한테 감사 해야 돼. 내 덕에 선생도 되고. 이 악물고 팔자 바꿀 동기 만들어 준 게 죄야?.”

이 대사를 비열한 웃음과 함께 읊어댄 박연진은 드라마 주인공 문동은의 학교폭력 가해자다. 고데기를 들이대 온몸을 지지는 건 예사일 정도로 끔찍했다. 열여덟 살 동은이의 친구 윤소희는 연진이네의 학폭에 시달리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죽을 것 같았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학교를 결국 자퇴한 동은은 이후 18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며 복수를 꿈꾸었다.

동은이네는 달방을 살았고 연진이네는 대 저택에 살았다. 드라마인데도 피해자가 당하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어 빨리 감기로 힐끗힐끗 보았다. 가해자들의 악랄한 장면은 저 작것들 저 작것들(것들의 사투리)” 부들부들 떨면서 보았다.

더 글로리 9화는 애초에 부자였고 현재도 부자인 박연진 일당 다섯 명에 대한 복수의 시작 편인데 시작부터 작것들 중 우두머리인 가해자가 뱉어낸 대사는 끔찍한 데자뷰를 내포하고 있다.

195310월 제3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 貫一郎)“36년간의 일본의 한국 강제 점령은 한국민에 유익하였다고 말했고, 2003년 아소다로(麻生 太郎) 당시 일본 자민당 정조회장은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은 당시 조선인들이 원해서 시행되었으며,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학을 설립하고 의무 교육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흘러 20233월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은 강제동원은 없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며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필요치 않다는 기자회견을 감행했다.

침략자나 가해자의 어법은 어떻게 저렇게 똑같을까. 일본 극우 인사들의 발언을 드라마에서 가해자 박연진은 적당한 상소리를 섞어가며 피해자 문동은에게 퍼붓고 있는 것이다.


저 이름들을 어찌할 것인가.

조용히 똬리를 틀었다가 이젠 대놓고 활개를 치는 한국 내 극우 인사들의 흔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접어두기로 한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였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도마 안중근과 19살 청년 유관순의 부은 얼굴이 응시하고 있는 자리였다. 7509명 사망, 15961명 부상. 46968명이 구금(출처: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저)당했던 그날의 문동은을 기억하는 날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고작 520초 총 1039자의 단촐한 연설문으로 기념했다.

그것도 수많은 문동은의 아픈 상처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후 외교부 장관 박진은 2018년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확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은 이른바 3자 변제방안을 공식화했다. 과거사에 대해 새로운 사죄 받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식민 지배받은 나라 중에 지금도 사죄나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있나라고 격정적인 훈수를 두었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찬성한다한일 관계의 모멘텀을 만들어냈다는 찬사를 보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주권과 국익차원의 용단으로 평가한다는 말로, 오세훈 서울시장은 국가의 실익을 위해 피해국이 갈등 해결을 주도해 풀어가는진정한 극일선언으로,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아예 나는 오늘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 일본의 사과와 참회를 요구하고 구걸하지 마라!”라는 도발적인 언어로 정부의 방안을 감쌌다. 바야흐로 35년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대한민국은 비온 뒤 돋아나는 희대의 난적 잡초(雜草)에 망연자실한 초보 농사꾼의 땅이 됐다. 다시 박연진의 대사가 이어진다.

용서? 누가 누굴. 왜 없는 것 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저 입을 찢어버려야 하나라는 연진을 향한 동은의 대사가 있은 뒤였다. 결말을 미리 말하자면 그때 연진은 입이 찢어지는 편이 더 나았다.

 

자작나무의 떨켜는 잠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닮았다.
자작나무의 떨켜는 잠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닮았다.

저 이름들을 어찌 부를 수 있을까


저 나무는 슬픈 전설의 여인 김 알렉산드라 / 저 나무는 민족사학자 계봉우

저 나무는 게릴라 전술의 일인자 한창걸 / 저 나무는 사할린 부대 박일리아

저 나무는 해삼위 어린 영혼의 선생님 이인순 / 저 나무는 솔빈강가의 유혼 이상설

저 나무는 침례교 목사 백추 김규면 / 저 나무는 레닌을 만난 박진순 한형권

대학 도서관 한구석에 박혀 남쪽의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

시베리아 동토에 새겨진 이름들 오래전 가지가 꺾인 저 나무들

저 나무는 멸문지화 가문의 아버지 최재형 / 저 나무는 고려공산당의 거두 오하묵

저 나무는 애국 외교관 이범진 이위종 이기종 / 저 나무는 고려 의용군 사령관 이용

눈발 날리는 자작나무 숲에 서서 오래전 가지 꺾인 나무의 이름을 묻고 눈물로 술한잔 올리고 싶었네 시베리아 동토에 서있는 저 나무들 / 이름들

저 나무, 시베리아 동토에 새겨진 이름들’ (이지상 글. )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러시아 백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우춰스 언덕 위에서 아무르 강에 던져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동휘의 맏딸 이인순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장티푸스로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헤이그로 기약없는 자주의 길을 떠났던 이상설은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언은 무덤도 제사도 그를 기억하는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중근의 최대 후견인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니콜리스크 포로수용소 옆 언덕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됐다.

조선인 빨치산 부대장 오하묵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됐고 대한제국 최초의 외교관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절망을 유서에 남겼다. 그리고 두 아들 이위종 이기종,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름도 남겼다.

모두 시베리아에 가지 않았다면 낯선 이름들이다. 노래를 만들면서 울었고 노래를 부르면서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래도 쉽게 부를 처지가 아니게 됐다. 독립된 나라에서 가장 빛나야 할 이 이름들을 어찌 부를 것인가.

또 오다테시 광산에서 단바에서 홋카이도에서 우토로에서 군함도에서 아니 일본 전역과 태평양 남양군도까지 이유도 모른 채 혹은 속아서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은 수많은 이름은 어찌 부를 것인가. 살아 돌아와 해방된 내 땅에 살면서도 결국엔 동정받는 생이기를 강요받는 굶어 죽어도 동냥 같은 돈은 안 받는다는 양금덕 할머니- 이름들을 무슨 낯으로 기억한단 말인가.

이지상 가수
이지상 가수

더 글로리에서 피해자 문동은의 복수는 찬란했고 가해자 박연진네의 결말은 참혹했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은 상상이나 허구보다 가혹하다. 가혹의 그림자는 언제나 피해자만을 에워싼다. 가해자의 환한 웃음 속에 피해자의 절규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다. 지금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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