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세 번 새해를 맞는 카자흐의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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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세 번 새해를 맞는 카자흐의 고려인
  • 김상욱 전문기자
  • 승인 2023.03.2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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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에 신년을 시작하는 나우르즈, 마슬레니짜 축제
서로 천막을 방문하고 음식을 나누며 전통놀이 즐겨
우리 동포들은 양력 1월 1일, 음력 설을 명절로 보내
알마티시 구광장에서 펼쳐진 2019년 나우르즈 축제.
알마티시 구광장에서 펼쳐진 2019년 나우르즈 축제.

중앙아시아의 맹주 카자흐스탄에서는 지금, 겨우내 묵은 때를 벗겨내는 대청소가 한창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집 안 청소는 물론이고 대문 앞 거리를 쓸고 응달진 담벼락에 남아 있는 잔설을 치운다. 시 당국은 겨우내 중단되었던 도로 물청소를 재개했는데, 아스팔트에 시원하게 물을 뿌리며 지나가는 물청소 차량은 봄이 왔음을 과시하듯 거리를 질주한다.

이런 도시 대청소는 나우르즈(322)’라고 불리는 카자흐인들의 민속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이루어진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카자흐인들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봄의 전령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새해의 첫날로 오래전부터 여겨왔다.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음()과 양()이 확장, 수축함에 따라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고 믿었던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지역(중국문화권) 사람들은 낮이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길이가 가장 긴 동지는 곧 낮이 다시 길어지는 시작점으로 인식하고 새해의 첫날이라고 여겼다. 우리 선조들이 동지를 작은 설날이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유라시아대륙의 중앙과 서남부 지역(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바로 이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어디에 기준을 두는 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나름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근거에 따라 변화의 시작점을 새해 첫날로 인식했던 것이다.

카자흐인들의 봄축제, ‘나우르즈

카자흐스탄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의 나우르즈 축제의 한 장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의 나우르즈 축제의 한 장면.

이 새해 첫날을 카자흐스탄과 이라크는 나우르즈라고 부른다. 이 명절은 페르시아 문화권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인도와 이란은 노우르즈, 튀르키예는 네브루즈, 우즈베키스탄은 나브루즈, 아제르바이잔은 노브루즈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명칭은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새로운 날(new day, 설날)’을 뜻하며 이날을 기해 약 2주에 걸쳐 다양한 의식, 축하 행사, 문화 행사 등을 치른다. 이때 행해지는 중요한 전통 중 하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특별한 요리를 먹는 것이다. 새 옷을 차려입고 친척 어른들에게 인사하러 가거나 이웃집을 방문하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거리에서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공연이 진행되고, 물 또는 불과 관련된 의식이 행해지며, 민속놀이가 펼쳐지고 수공예품 만들기 등의 행사가 마련된다.

카자흐스탄사람들도 나우르즈를 전후한 3일간의 공휴일 동안 떨어져 살았던 부모와 친지들이 모여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고, 민속 경기를 즐긴다. 마을마다 열리는 대규모 봄축제의 현장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을 가르치는 배움의 장이 되고, 소수민족들도 카자흐스탄이라는 지붕 아래에 사는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평화와 화합을 다짐한다.

유목민이었던 카자흐인에게 나우르즈의 첫 번째 의미는 봄의 전령이다. 가축이 새끼를 낳는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유목민들은 자연이 깨어나고,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이 새롭게 살기 시작하는 나우르즈를 날 중의 최고의 날이라고 여겨서 축제를 열고 덕담을 건네며 소원을 빌어준다.

나우르즈 축제기간 중 유목민의 천막 ‘유르타’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돔브라 연주를 들려 주고 있다.
나우르즈 축제기간 중 유목민의 천막 ‘유르타’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돔브라 연주를 들려 주고 있다.

두 번째 나우르즈의 의미는 친교이다. 새 옷을 입고,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 유르타로 손님을 초대해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겨우내 먹고 남은 묵은 고기로 빚는 전통음식인 나우르즈 코줴를 대접한다. 코줴는 나우르즈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코줴를 먹기 위해 서로의 집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말 경주, 폴로와 비슷한 마상경기인 콕파르’, 씨름, 말 타고 달리는 여성을 잡는 크즈 쿠우등의 민속놀이를 즐긴다.

나우르즈의 세 번째 의미는 겨울의 묵은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각자의 집이나 마을을 청소하고, 길목을 깨끗이 단장하고 나무를 심기도 한다. 카자흐인들은 카자흐어로 알튼바칸이라고 하는 그네를 타며 나우르즈 축제를 즐겁게 보낸다.


축제의 꽃, 음식과 음악

나우르즈 코줴. 맛은 다소 시큼하고 말고기 향이 나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다소 맞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나우르즈 코줴. 맛은 다소 시큼하고 말고기 향이 나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다소 맞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축제의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건 바로,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나우르즈 코줴는 첫째로 꼽힌다. 이 음식은 요구르트의 원형 격인 케피르와 우유, 벼와 같은 통곡물류, 건포도와 같은 견과류 그리고 말고기를 잘게 찢어 넣고 만든 수프이다. 맛은 다소 시큼하고 말고기 향이 나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맛에 다소 맞지 않을 수 있으나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두 번째 요소는 음악이다. 카자흐인들의 영혼이 담긴 돔브라를 든 수백 명의 청년이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에서 연주하는 장면은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그 어떤 북소리보다, 그 어떤 화려한 군무보다 더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다.

돔브라는 몽골의 덥쇼르라는 악기처럼 두 개의 현으로 되어있고 연주 방법은 기타와 비슷하다. 지금도 국경일이나 가정의 대소사 또는 학교행사때에도 어김없이 연주되는 것이 바로 돔브라다. 돔브라를 이용한 공연예술을 돔브라 큐라고 하는데,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1926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 집권기 카자흐스탄에서는 나우르즈를 기념하지 않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집권하고 추진했던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나우르즈 명절을 다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3일 연휴로 지정된 것은 2009년에 와서다. 나우르즈는 2009,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러시아인의 봄축제, 마슬레니짜

올해 열린 마슬레니짜 축제에서 대형 블리늬를 굽는 장면. 리아 노보스찌 화면 캡처.
올해 열린 마슬레니짜 축제에서 대형 블리늬를 굽는 장면. 리아 노보스찌 화면 캡처.

마슬레니짜라는 러시아인들의 봄맞이 축제도 있다. 구소련시절, 카자흐스탄 전체인구의 과반이었고 현재까지도 약 25%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인들은 겨울이 끝날 무렵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마슬레니짜라는 봄축제를 연다.

통상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일주일 동안 축제를 즐기는데, 축제 첫날에는 겨울을 상징하는 인형 추칠라를 만들고, 태양을 상징하는 러시아 음식인 블리늬(러시아식 얇은 부침개)를 일주일 내내 질리도록 먹으며 따뜻한 햇볕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축제 마지막 날에는 추칠라를 태우며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봄이 어서 오길 기원한다.

마슬레니짜라는 말은 마슬로(버터)’에서 기원했다. 이 축제의 대표 음식은 단연, 밀가루와 달걀, 우유를 섞어서 팬에 얇게 부치는 블리늬이다. 만약 당신의 직장 동료 중 러시아인이 있다면, 이들이 점심 도시락으로 싸 오는 블리늬를 통해서 러시아인들의 봄축제 마슬레니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간 지속되는 이 축제의 요일마다 주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월요일은 만남의 날’, 화요일은 유희의 날’, 수요일은 미식가의 날’, 목요일은 흥청망청 즐기는 날’, 금요일은 장모의 날’, 토요일은 시누이 초대의 날’, 마지막 일요일은 용서의 날이다.

축제 첫날은 겨울을 상징하는 허수아비 추칠라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가족 단위로 즐긴다. 넷째 날인 목요일이 되면, 모두가 즐기는 마슬레니짜로 전환되어 축제의 규모가 한층 커진다. 눈싸움, 원무(강강술래), 말타기 등의 놀이를 즐긴다.

이날 남성들은 집단 패싸움을 벌이는데, 맨손만 사용하기, 한 사람만 집중적으로 때리지 않기, 쓰러진 사람을 또 때리지 않기 등 엄격한 규칙 하에 진행된다. 이것은 한 해의 묵은 감정을 날려 보내는 러시아인의 특별한 의식이다. 이 밖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모닥불을 피우고, 불 한 가운데를 뛰어넘는 놀이를 통해, 러시아인은 다가오는 봄에 대한 기대를 한껏 표출한다.

축제의 마지막 날은 마슬레니짜 축제의 절정에 해당된다. 서로를 불편하고 모욕을 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날이다. 고인을 추모하고 목욕재계를 하며 축제의 남은 음식을 불태우고 접시를 깨끗이 닦는다. 또한 축제 첫날 만들어놓은 추칠라를 불에 태워 재를 들판에 뿌림으로써 겨울이 완전히 물러갔음을 선포함으로써 축제를 마무리한다.

겨울의 온갖 묵은 때를 지푸라기 인형으로 상징화하여 화형하는 의식, 해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먹는 블리늬, 남성들의 놀이를 통해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과 조상숭배, 목욕재계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이하는 조상들의 풍습을 지켜오고 있다.

나우르즈 축제의 한 장면. 카자흐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들이 팔씨름을 하고 있다.
나우르즈 축제의 한 장면. 카자흐 전통의상을 입은 남성들이 팔씨름을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세 번에 걸친 새해맞이 풍습을 지키며 살아간다. 한 해의 첫날인 11, 카자흐스탄에 사는 모든 민족과 함께 축하하고 음력 11일에는 우리 민족 고유 명절인 설날을 동포들과 함께 맞이한다. 3월이 오면 카자흐인들의 설날인 나우르즈 축제를 함께 즐기면서 또 한 번의 새해와 봄맞이를 한다.

이렇게 설날을 세 번 지내다 보면 한해의 4분의 1이 훌쩍 지나가 버리기도 하지만, 신년 초에 세웠던 새해 계획이 설사 작심삼일이 되어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창밖 화단의 나뭇가지들이 꽃망울을 터뜨린 걸 보니, 올해도 봄은 어느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김상욱

알마티국립대 조선어과 교수로 카자흐스탄 땅을 밟은 지 29년. 한글 동포신문 주필이고 연합뉴스를 통해 중앙아시아 5개국 뉴스를 전하고 있다. EBS ‘세계테마기행’에 여러 차례 출연했고 KBS ‘1박2일’에서도 고려인 강제이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부부사진전 ‘카자흐스탄’을 열었고, 사진집 <카자흐스탄>과 공저로 두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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