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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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이 아름답다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3.03.3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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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 역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재미있고 동적인 도시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난 문화의 용광로에 가보니

 

이제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간다. 크레타섬 하니아국제공항에서 아테네행 비행기를 탄다. 아테네공항에서 내려 튀르키예 이즈미르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심리적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가깝다. 터키공화국은 지난해 국호를 튀르키예공화국으로 바꿨다. 영어로 터키(Turkey)는 칠면조를 가리키고 속어로 겁쟁이, 패배자를 의미해 그동안 여러차례 국호를 변경하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튀르키예는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면적은 매우 넓어 우리 한반도의 3.5배, 남한의 7~8배에 달한다.

튀르키예는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나라다. 동서양의 길목에 위치해 수많은 문명이 흥했다 멸망하는 등 부침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많다. 더욱이 한국과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로 각별한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번 튀르키예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진심으로 가슴아파 하면서 도왔다. 지금도 튀르키예 돕기 모금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튀르키예 국민들은 ‘코리아 최고’ ‘코리아 땡큐’라며 환대했다.

튀르키예는 관광국가다. 관광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데 지진이 발생해 큰 손해를 봤다는 후문이다. 관광지에서 만난 일부 상인들은 이런 말을 전하며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참사로 인해 마음은 무거웠으나 이왕 왔으니 고대문명의 뿌리를 찾아 다니는 문화탐방을 알차게 하기로 했다.

튀르키예는 그리스로마 문명, 수메르·히타이트·아시리아를 비롯한 고대문명, 비잔틴문명, 오스만제국 이후의 이슬람문명이 거쳐간 덕분에 시대를 달리하는 다양한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이스탄불·부르사·트로이·베르가마·이즈미르·파묵칼레·카파도키아. 이름만 들어도 유구한 역사와 저마다 아름답고 독특한 풍광, 음식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넓어서 몇 개 도시를 선택해 갈 수밖에 없다. 일행들은 6일 동안 이즈미르에서 시작해 부근 도시를 돌아본 뒤 이스탄불을 거쳐 귀국했다. 그러나 문명탐방기는 이스탄불부터 시작한다. 

 

이스탄불의 상징 아야소피아 박물관 내부
이스탄불의 상징 아야소피아 박물관 내부

 

이스탄불은 과연 국제도시였다. 도심은 서울시내 한복판처럼 사람과 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주차공간 찾기도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탄불에는 튀르키예 인구의 20%인 1500만명이 산다. 평소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이스탄불은 5000년 역사를 간직한 역사도시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를 품은 도시 아닌가.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이었고,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 때는 콘스탄티노플로 바뀌었다. 이후 오스만제국 때 이스탄불이 됐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 때는 수도였다. 20세기에 튀르키예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는 앙카라가 수도가 됐다.

또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문화의 용광로인 만큼 아름답고 재미있고 동적이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껴안고 있다. 그래서 위치를 말할 때는 유럽지구냐, 아시아지구냐를 구분한다. 현재 이스탄불 시민의 셋 중 둘은 유럽, 한 명은 아시아지구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을 중심으로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로 나뉜다. 유럽지구는 다시 보스포루스의 지류인 골든 혼을 기점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물길을 따라 이렇게 세 지역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갈 때는 배를 타거나 육로를 이용해 자동차를 탄다. 배는 연신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데려오곤 했다. 도시 중심에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해안가에는 예쁜 건물들이 들어서 경치가 아름다웠다. 야경도 훌륭했다. 보스포루스 대교와 술탄 메메트 대교는 유럽과 아시아를 육로로 연결했고, 마르마라해협을 가로지르는 해저터널 역시 두 대륙을 이어 자동차로 달릴 수 있다.

 

보스포루스해협
보스포루스해협

 

유럽지구 중 구시가지에는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던 시기의 유적이 있다. 기원전 7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오래된 곳인가. 여기에는 이스탄불의 상징인 술탄아흐멧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전세계 관광객들이 보러 오는 아야소피아 박물관, 술탄아흐멧 1세 자미, 토프카프 궁전, 예레바탄 사라이 지하 저수조 등이 자리잡고 있다. 자미는 이슬람사원을 말한다.

신시가지는 이스탄불의 금융과 생활 중심지다. 탁심광장과 이스티클랄 거리가 특히 번화하다. 각종 쇼핑센터, 음식점, 호텔, 카페가 들어섰다. 아시아지구는 20세기 중반들어 이스탄불로 편입됐다고 한다. 주거지역과 공업지역이 있으며 유럽지구처럼 유적이 많지는 않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과 술탄아흐멧 1세 자미
 

이스탄불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 아침 술탄아흐멧 광장으로 나갔다. 술탄은 이슬람왕조의 군주를 말한다. 오전 10시인데도 벌써 아야 소피아 박물관 앞에는 길고 긴 줄이 있었다. 다행히 무료입장이라 줄은 빨리 줄어들었고 30여분 만에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가방 검사와 몸 수색을 한다. 이슬람사원이라 복장도 단정해야 한다. 여성은 히잡이나 스카프를 써야 한다. 관광객들도 예외가 아니라 검은색 스카프를 썼다. 민소매나 짧은 바지, 짧은 치마 차림은 안된다고 한다. 신발도 벗었다.

아야소피아는 360년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처음 건설했다. 이어 몇 차례 화재를 입은 후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537년에 지금의 건물로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잔틴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건물은 그리스정교의 총본산으로 지어졌으나 오스만제국이 점령한 뒤 이슬람사원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박물관이 됐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기독교 교회 ‘하기아소피아’를 지었으나 오스만제국이 들어온 뒤 ‘아야소피아’로 이름을 바꾼 것. ‘하기아소피아’는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를 뜻한다. ‘아야소피아’는 오스만식 표기법.

그리고 건물 외부에는 이슬람 첨탑인 미나레 4개를 세우고 내부 벽의 기독교 성화를 회반죽으로 가렸으며 여기저기 손을 댔다고 한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영광과 아픔이 공존한다. 아야 소피아는 2층까지 있으나 1층 관람만 허용됐다. 내부는 정말 넓고 화려했다.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었다. 머리와 눈으로 기억하기 위해 자세히 훑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나서면 정면에 술탄아흐멧 1세 자미가 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웅장한 이슬람 사원이며 오스만제국의 상징 같은 건물이다. 외벽 청색 타일과 내부의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인해 ‘블루 모스크’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는 유난히 첨탑 미나레가 많다. 6개나 된다. 미나레의 수는 자미를 만든 사람의 지위와 비례한다고. 술탄의 자미는 4개를 세우게 되어 있는데 2개나 더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에 줄 선 관람객들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에 줄 선 관람객들

 

 

지하궁전 안의 메두사
지하궁전 안의 메두사

 

또 박물관 건너편 쪽에는 지하궁전이 있다. 궁전이라기 보다는 저수조다. 5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었고 후에 유스티나누스 때 증축했다. 당시 시민들의 생활용수를 저장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 양이 8만톤이라고 한다. 코린트식 기둥 336개가 도열해 있는데 모양이 다른 이유는 여기저기 신전에서 뽑아왔기 때문이라는 것. 그 중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 조각을 받침대로 사용한 기둥 2개가 유명하다. 이 곳은 관광객들이 한 줄로 서서 구경할 정도로 관광상품이 됐다.
 

‘빨리 나으세요. 나의 튀르키예’
 

술탄아흐멧 광장 주변에는 중요한 역사유적이 모여있어 행인들이 많다. 시내버스와 트램도 자주 지나갔다. 유럽에 가면 노면전차인 트램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스탄불도 트램이 활성화된 도시다. 트램은 일단 턱이 없어 타고 내리는 게 편리하다. 유모차나 자전거도 쉽게 실을 수 있다. 외관도 멋지다. 이스탄불에 있는 동안 트램을 몇 번 탔는데 시내버스보다 훨씬 편하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차창 밖으로 검은 리본을 그려넣은 광고판이 보였다. 번역하면 ‘빨리 나으세요. 나의 튀르키예’라는 뜻이었다. 알고보니 지진 피해를 당한 국민을 위로하는 광고였다. 마음이 아팠다.

거대한 역사도시답게 이스탄불에는 박물관이 많다. 고고학박물관, 튀르키예·이슬람 유물박물관, 모자이크박물관, 카리에박물관 등 등. 찬란했던 역사를 훑어보기 위해 고고학박물관에 간다. 튀르키예 최초의 박물관이다. 알렉산더 관이 있으나 실제는 알렉산더 대왕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는 고대 히타이트인들과 이집트인들 사이에 체결한 평화조약의 내용을 새긴 카데쉬 점토판이 유명하다. 기원전 1258년 유물이다.

다음 날 유럽지구에서 아시아지구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20여분 만에 도착했다. 평소 교통체증을 피해 이 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장 번화한 탁심광장 거리를 걸었다. 튀르키예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동상이 있었다. 광장은 인산인해였고 활기가 넘쳤다. 과일을 그 자리에서 착즙기로 짜주는 카페, 튀르키예식 커피를 파는 카페가 많았다.

 

이스탄불의 트램
이스탄불의 트램

 

다시 배를 타고 건너와 5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그랜드 바자르를 구경하기로 한다. 바자르는 시장이다. 15세기 무렵 실크로드 종착역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오는 동방의 문물을 거래하던 곳이라니. 아직도 역사를 이어간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출입구만 20개가 넘고 5000여개의 상점들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물건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한국말을 써붙인 상점들도 몇 군데 된다. 길거리음식도 풍성했다.

튀르키예 음식은 단연 케밥이다. 케밥은 ‘구운 음식’이라는 뜻이므로 종류가 무척 많다. 여기 있는 동안 고기와 채소, 과일 등을 한꺼번에 굽는 요리를 많이 먹었다. 튀르키예는 이슬람 국가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신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를 먹는다. 꼬치구이처럼 만든 케밥과 넓은 오븐에 여러 가지를 굽는 케밥, 되네르라 불리는 세로 회전구이 케밥이 흔하다.

 

15세기경에 생긴 그랜드 바자르
15세기경에 생긴 그랜드 바자르
한국어를 잔뜩 써붙인 그랜드 바자르의 한 상점
한국어를 잔뜩 써붙인 그랜드 바자르의 한 상점
케밥의 일종인 되네르
케밥의 일종인 되네르
고기와 채소, 과일 등을 함께 구운 케밥
고기와 채소, 과일 등을 함께 구운 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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