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시대 역사유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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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시대 역사유적 앞에서
  • 홍강희 기자
  • 승인 2023.04.05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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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에페스 유적은 고대 로마시대 생활상 한 눈에 보여줘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장소 사도요한 교회·성모마리아의 집 가볼만

 

튀르키예는 넓다. 남한의 3.5배, 한반도의 7~8배에 달한다. 이번 강진으로 안타깝게도 도시 전체가 초토화된 가지안테프와 주변 도시는 튀르키예 아래 쪽인 동남부에 있다. 이스탄불 등 서부지역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이번에 일행들이 간 곳은 이스탄불과 베르가마, 이즈미르, 셀축, 에페스, 파묵칼레 등이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던 이스탄불은 당연히 가봐야 하는 도시다. 이스탄불을 가지 않고 튀르키예를 봤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이스탄불과 에게해에 인접한 베르가마, 이즈미르, 셀축, 파묵칼레를 돌아 보았다.

튀르키예에 도착한 후 이즈미르 국제공항에서 내려 에페스로 갔다. 늦은 저녁 대부분의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불켜진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섰는데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를 주재료로 한 케밥을 팔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주인이 형제의 나라라며 반색을 한다. 그는 지인의 아저씨가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줬다. 주인과 번역기를 돌려가며 서로 대화를 했다. 이럴 때 번역기는 참으로 유용하다. “한국인들이 튀르키예 지진 소식을 듣고 모두 걱정했다. 어서 빨리 회복하기 바란다”고 하자 연신 고맙다며 덤까지 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식당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여기 있는 동안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이제 고대유적을 찾아 떠난다.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고대유적들은 아직도 발굴 중이라고 한다. 발굴되지 않은 곳이 허다하다고 한다. 셀축은 이즈미르 주에 있는 도시로 에페스 유적을 비롯해 사도요한 교회, 성모마리아의 집, 아르테미스 신전 등 대단한 볼거리들이 많다. 에페스는 에페소스의 튀르키예식 발음이다. 그 중 에페스 유적은 우리들을 먼 과거로 안내했다. 사도요한 교회와 성모마리아의 집은 기독교, 이사베이 모스크는 이슬람교와 관련있는 곳이다. 이렇게 도시 전체에 그리스, 기독교, 이슬람 문화가 흐른다.

 

찬란했던 고대 로마시대를 보여주는 에페스 유적
찬란했던 고대 로마시대를 보여주는 에페스 유적

 

다양한 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귀족들의 집터
다양한 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귀족들의 집터

 

비잔틴제국 때 지은 교회
 

사도요한 교회는 비잔틴시대에 건축된 걸작으로 꼽힌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요한은 제자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예수의 부탁을 받고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스로 이주했다고 한다. 사도요한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과 복음서를 썼다. 사도요한이 세상을 떠난 후 아야술룩 언덕에 묻혔고 그 무덤 위에 작은 교회를 세웠다는 것. 이후 6세기 경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유스티아누스가 석조건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 것이 지금의 교회다.

성모마리아의 집은 예수의 어머니 성모마리아가 사도요한과 함께 살던 집. 1878년 독일인 수녀 캐더린 엠머리히는 예수와 성모에 관한 꿈을 자주 꾸었고, 독일의 가톨릭 시인인 브렌타노는 이를 바탕으로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후에 고고학자와 성서학자들은 성모마리아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캐더린 엠머리히가 환시를 통해 봤다는 집과 비슷한 이 집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종교계에서 논란이 일자 1961년 교황청이 이 집을 공식적인 성지로 인정했다고 한다. 사도요한 교회와 성모마리아의 집은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성지순례 장소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신전은 대리석 기둥 127개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기둥 한 개만 남아있다. 이것은 고대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꼽힌다. 고대 7대 불가사의는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 작품에서 기원한다. 지중해와 중동지방에 남아있는 조형물이나 건축물 중 탁월하게 아름답거나 가치가 뛰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

 

고대 로마시대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에페스 유적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넓은 고대 유적지다. 그것은 광활하면서도 화려했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당시의 도서관, 원형극장, 목욕탕, 병원, 아고라, 신전은 물론이고 귀족 저택, 공중화장실, 유곽터까지 있었다. 더러는 부서지고, 더러는 형체가 남아 그 시대를 후손들에게 전해줬다. 고대 로마시대 유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이런 건물들이 파괴된 원인은 전쟁과 자연재난이 가장 큰 데 자연재난 중에서는 지진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어떤 자연재난은 만만할까마는 지진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쓸어버려 예나 지금이나 무섭다.

 

공중화장실 터를 구경하는 관광객들
공중화장실 터를 구경하는 관광객들

 

고대 로마시대의 목욕탕
 

에페스 유적은 헤라클레스 문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전용구역과 누구나 이용하던 공동구역으로 나뉜다. 남문에서 걸어 내려가면서 귀족들의 전용구역부터 보았다. 모든 유적지의 안내판에는 파괴되기 전 옛날 당시의 모습과 현재 모습, 도면이 그려져 있다. 이를 보면 과거와 현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바리우스 목욕탕을 만난다. 로마시대에는 목욕탕 문화가 발달해 곳곳에 목욕탕이 있었다. 4세기 경에는 목욕탕이 1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고대 유적지에서도 빠짐없이 목욕탕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바리우스 목욕탕은 냉탕, 온탕, 열탕, 사우나 시설까지 갖춘 최첨단 목욕탕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목욕을 즐겼는지 알 수 있다. 목욕탕과 함께 예외없이 등장하는 건 아고라. 여기서도 아고라의 흔적이 보였다.

다음은 오데온이라 불리는 부채꼴 모양의 소극장이 나오고 행정구역, 의회, 병원, 도미티아누스 신전, 니케 조각상이 이어진다. 행정구역은 도시의 행정을 처리하던 곳이었다는 데 지금은 기둥만 남아있다. 여기서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발굴됐고 지금 여신상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 당시 행정구역이 따로 있고 의회도 있었다니 놀랍다. 니케 조각상은 승리의 여신 니케를 묘사한 작품이다. 로마의 승리를 보장하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은 미국으로 건너가 ‘나이키’가 됐다.

테라스 하우스1에 들어가면 실제 사람들이 살았던 집 터가 보존돼 있다. 안내판에는 방, 거실, 화장실 등이 각각 있었던 자리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테라스 하우스2는 귀족들의 집 터다. 안에는 수많은 벽화와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등이 있다. 당시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눈으로 확인한다. 하수와 급수시설도 잘 돼있었다. 이 구역은 차단벽으로 가려져 있다. 따로 티켓을 사서 들어가야 한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과 하드리아누스 신전, 공중화장실의 흔적도 보았다. 목욕탕은 1세기에 만들었지만 4세기에 스콜라스티카라는 여성이 복원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냉탕, 온탕, 열탕이 확인된다. 우리나라 온돌처럼 뜨거운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쐬며 목욕을 했다니 흥미롭다. 코린트 양식으로 제작된 기둥과 아치, 벽면을 따라 부조가 새겨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아름다웠다. 공중화장실은 아래 물이 흐르는 수로가 설치돼 있고 그 위에서 볼일을 보게 돼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에페스의 켈수스 도서관
웅장하고 아름다운 에페스의 켈수스 도서관

 

당시 2만5000명을 수용했다는 원형극장
당시 2만5000명을 수용했다는 원형극장

 

아, 그 유명한 켈수스 도서관이구나 
 

이제 에페스의 상징 켈수스 도서관으로 간다. 영어로는 셀수스라고 부른다. 도서관의 규모는 웅장하고 조각작품은 섬세했다. 2세기 중반에 학문을 사랑하던 아시아주 총독이던 켈수스를 기려 아들 율리우스 아킬라가 지은 건물이다. 대지진으로 무너진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 1만2000권의 두루마리 자료를 보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자료는 종류에 따라 분류해서 입구에 써 붙였고, 책이 보관돼 있던 곳에는 바람이 통하는 공기구멍이 있었다. 당시에 이렇게 과학적이었다는 것이다. 입구에는 지혜와 지식, 지성과 용기를 상징하는 여성들의 조각작품 4개가 서있다. 그러나 이는 복제품이고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이 도서관에서 항구로 연결되는 도로변에는 상업용 아고라가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이 거래되는 시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에페스의 규모와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때 인구가 20~25만명이었다고 하니 꽤 큰 도시였던 것.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인들이 건설하고 로마시대에 개조했다는 원형극장은 보존이 잘 돼있었다. 2만5000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지름 154m, 높이 38m의 반원형은 정말 크고 넓었다. 당시에는 검투장으로 쓰였고 지금은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아르테미스 조각상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아르테미스 조각상

 

에페스 고고학박물관에는 에페스와 셀축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르테미스 조각상이다. 그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누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는 에페스의 수호신으로 숭배돼 왔다. 박물관에는 3개의 아르테미스가 있다. 아름다운 아르테미스, 위대한 아르테미스, 머리와 팔이 없는 아르테미스다. 모두 1~2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처녀 사냥꾼으로 나오지만 로마시대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다. 수많은 가슴이 이를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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