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太初)와 태종(太終), 그리고 무(無)
상태바
태초(太初)와 태종(太終), 그리고 무(無)
  • 권재술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3.04.12 11: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주와 나, 모든 존재의 시작은 ‘빅뱅’이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나라는 한 인간도 시작이 있었습니다. 출생이 바로 나의 시작이겠지요? 그런데 나의 출생이 진정으로 나라는 존재의 시작일까요? 나는 출생 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나의 시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나누던 순간으로 더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만나는 순간이 진정으로 나라는 존재의 시작이라고 보면 될까요? 어머니의 난자는 아버지의 정자를 만나기 전에도 존재했을 겁니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가 없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 시조 할아버지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조 할아버지가 나라는 존재의 최초의 원인은 아닙니다. 더 올라가면 원숭이나 오랑우탄, 더 올라가면 물고기나 아메바, 더 올라가면 생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RNADNA 같은 분자, 더 올라가면 아미노산 분자가 나의 시작일지 모릅니다. 분자는 원자가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원자는 어디서 왔을까요? 원자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 빅뱅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의 시작은 빅뱅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빅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나의 나이는 138억 살이 되는 셈입니다. 나만 138억 살일까요? 아닙니다. 내 손자도 138억 살입니다. 지구의 나이를 46억 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태양 주위에 흩어져 있던 물질이 모여서 지구가 만들어지는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출생이 나의 진정한 시작이 아니듯이 46억 년 전이 지구의 진정한 시작은 아닙니다. 지구를 만든 이 물질은 어디서 왔을까요? 가깝게는 별에서 왔고 더 올라가면 모두 빅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구의 나이도 138억 살입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138억 살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빅뱅으로 태어났으니 모두 형제들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어느 움막에서 배고파 울고 있는 아이와 내가 동갑내기 내 형제입니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군인들이 나와 동갑내기 형제들입니다. 튀르키에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신음하다가 생을 마감한 어린아이가 나와 동갑내기 형제입니다. 이처럼 빅뱅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태초란, 말 그대로 그 이전이 없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빅뱅은 태초일까요? 빅뱅은 우리 우주의 시작입니다. 빅뱅 이전에 우리의 우주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 우주만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우주도 있을까요?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엇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까요? 빅뱅 이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어야 하겠지요? 나라는 존재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진정으로 나라는 존재의 끝일까요? 나라는 생명 현상은 죽음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분해되어 미생물의 먹이가 되고, 그것은 다시 사람들의 양분이 되기도 하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 흩어져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먼 훗날 다시 별이 될 것입니다.

나의 육체만이 나라는 존재의 전부일까요? 내가 했던 생각,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나라는 존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이렇게 보면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간단하게 국경선을 그리듯이 그렇게 경계가 그려지는 존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구와 태양 그리고 우주의 별들은 영원할까요? 모든 물질은 반감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의 반감기는 짧고, 어떤 물질의 반감기는 깁니다. 하지만 모든 물질은 반감기가 있습니다. 그 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주의 별들이 다 소멸하여 텅 빈 우주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주의 모든 별이 사라지게 되면 완전히 세상의 끝일까요?

이전이 없는 시작을 태초(太初)라고 한다면 다음이 없는 끝을 태종(太終)이라고 부릅시다. 태초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초 이전이 없어야 하고, 태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종 다음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없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뭐가 없다는 말인가요? 아무것도 없어야 하겠지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없다는 것조차 없어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무()라고 한다면 무조차도 없어야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Nothing comes of nothing’,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제 책, ‘우주, 상상력 공장의 첫 장의 표지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온다.’라고 해야 할까요? 에서는 가 나올 수 없다는 말과 에서 가 나온다는 말은 아주 다릅니다. 전자는 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면 후자는 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가 존재한다면 무는 이미 무가 아닙니다. 말장난 같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노자의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닙니다. ()를 무라고 하면 이미 무가 아닙니다. 태초와 태종이 있으려면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없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무를 무라고 하면 이미 무가 아니니 결국 태초와 태종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