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의 영원한 디아스포라 ‘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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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들의 영원한 디아스포라 ‘한식’
  • 카자흐스탄=김상욱 전문기자
  • 승인 2023.04.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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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교포들 ‘부모의 날’로 기리며 조상 섬겨
공동묘지에서 친척들은 물론 ’옛 이웃’들도 만나는 날
증편이(절편)‧찰떠기(찰떡)‧가주리(한과), 술은 보드카
알마티 시내에 있는 릐스꿀로바 공동묘지의 한 고려인 묘지. 비석과 봉분을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 김상욱
알마티 시내에 있는 릐스꿀로바 공동묘지의 한 고려인 묘지. 비석과 봉분을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 김상욱

2020년에 이어 윤달이 있는 올해,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사회에서는 한식을 지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은 동포 지도자들의 한 대화방에서 시작됐다.

카자흐스탄을 넘어 구 소련지역 최대의 고려인문화센터인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회장 신 안드레이) 임원들이 사용하는 대화방에는 최근 올해의 한식은 음력 2월에 이어 윤달(322~ 419)에 끼어 있으므로 부모나 조상 산소에 손을 대거나 성묘하면 안 된다는 정보가 올라왔다.

예부터 양력과 음력을 함께 사용해 오면서 우리의 전통 풍습을 지켜오고 있는 고려인들은 갑작스러운 이 정보를 접하고 적잖이 당황해했다. 어떤 이는 귀한 정보를 모든 동포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는 우리 고려인들은 윤달을 썩은 달이라고 불러 왔다면서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니 여느 해처럼 전통 명절 한식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논란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고려일보 편집국은 한식을 지켜야 할지를 묻는 동포들의 전화벨 소리로 시끄러웠고 내가 원장으로 일하는 고려문화원에도 이를 문의하는 전화가 여러 차례 걸려왔다.

급기야는 몇몇 동포들이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고려인 역사 연구가로 유명한 강 게오르기 교수에게 문의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사실은 강 교수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옴으로써 알게 되었는데, 나 또한 윤달과 한식논란을 잠재울 확실한 근거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는 윤달에는 손 없는 날이라 해서 미뤄왔던 부모 산소의 이장을 하거나 이사를 실행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윤달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식날 성묘를 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던 터라 평소 하던 대로 한식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먼저 구글링을 해 보았다.

고려인들에게 한식

고려인 가족들이 부모의 묘소에 꽃을 놓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진=김상욱
고려인 가족들이 부모의 묘소에 꽃을 놓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진=김상욱

음력과 계절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약 3년에 한 번 정도 끼워 넣은 달인 윤달은 부정을 타지 않는 달, 탈이 없는 달로 여겨져 왔다. 우리 선조들은 신들이 윤달에는 활동하지 않아서 어떤 일을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윤달에는 묘지 이장을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이사, 출산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좋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반대로 해석되어서 윤달에 결혼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결국, 한국의 전문가에게 문의하게 되었고, 아무런 해가 없으니까 여느 해처럼 한식날 성묘해도 된다는 답을 받았다.

즉시 강 게오르기 교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동포 지도자 단체 대화방에 이 같은 사실을 러시아어로 써서 올렸다. 그 뒤 이 시간까지도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단체 대화방에는 고맙다는 내용의 댓글이 이어지면서 며칠 동안 단체 대화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즉시 가라앉아버렸다.

고려인들이 혹시나 윤달 때문에 한식을 못 지키는 것이 아닌지 마음 졸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한식이 고려인들에게는 최대의 명절이라는 것을 이번 논란으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부모의 날로 부르기도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고려인은 민족의 전통 명절 대부분을 지금까지도 지켜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윤달과 한식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한식을 가장 큰 전통 명절로 지낸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설날과 추석에 크게 밀려난 한식을 부모의 날(родительский день)’이라 부르며 돌아가신 부모, 형제의 산소를 찾아 성묘와 벌초를 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한식은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 45일 또는 6일에 해당하는데, 올해는 6일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매년 45일이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부모와 조상의 묘소를 찾는다. 무덤 주변의 풀을 뽑고 흙을 올린다.

중앙아시아는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흙으로만 되어 있는 봉분이 흘러내린다. 그래서 매번 흙을 올리는 일을 한식에 한다. 고려인들이 한식을 흙을 올린 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묘지의 봉분 위에 흙을 올리고 예쁜 꽃을 놓을 뿐만 아니라 봉분 주변 철제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묘비를 물로 깨끗이 씻는다. 묘비에는 고인의 이름과 출생일, 사망일을 음각해 넣는데, 최근에는 고인의 초상화를 음각해서 넣거나 봉분 대신 검은 대리석을 까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의 한식 상차림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한식 때 알마티의 한 고려인 가족이 릐스꿀로바 공동묘지에서 상을 차리고 성묘하고 있다. 사진=김상욱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한식 때 알마티의 한 고려인 가족이 릐스꿀로바 공동묘지에서 상을 차리고 성묘하고 있다. 사진=김상욱

이날 음식은 보드카, 과일, 증편이(절편), 찰떠기(찰떡), 찜닭, 가주리(한과), , 질금이(콩나물), 깝초네(훈연생선), 삶은 계란, 물밥 등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산소에 가져가서 제사를 지낸다. 성묘 후에 어머니가 계신 경우는 어머니 집에서, 두 분 모두 돌아가신 경우는 부모를 모셨던 자식의 집, 대개 아들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남은 음식은 친척들에게 싸주기도 한다.

한식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손들이 부모의 성묘를 위해 모이는 날이기도 하고, 고향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도 성묘를 위해 북망산(공동묘지)을 찾기 때문에 친척 말고도 예전의 마을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되는데, 그래서 한식은 고려인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갖게 해주는 날이기도 하다.

4만 명 가까운 고려인 동포들이 사는 알마티에서도, 매년 한식날에는 꽃을 들고 시내 릐스꿀로바 공동묘지나 시외 부룬다이 공동묘지 등에 안장돼있는 부모나 친지들의 묘소에 성묘하러 가는 고려인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알마티 시내에서 가까운 릐스꿀로바 공동묘지 앞에는 고려인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곳에는 고려극장의 아리랑 가무단을 만든 김 블라지미르 선생, 고려일보 주필이었던 양원식 선생을 비롯한 많은 고려인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한식 지키기는 코로나 위기가 한창일 2020년에도 이어졌다. 당시 알마티시청은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간부들에게 보내는 협조 공문을 통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오는 5일 가족들이 모여서 부모 산소를 가는 고려인의 풍습인 한식을 자제해 줄 것과 이 내용을 전체 고려인 디아스포라에 공지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그때 카자흐스탄은 러시아나 유럽 국가들보다 확진자 수는 적지만, 그 국가들과 인적·물적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316일부터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이후 30일부터는 시내 이동 금지, 재택근무령 등 공세적인 방역과 제한 조치들이 내려졌을 때였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고려인동포 사회는 성묘 대신 집에서 한식을 맞이하는 초유의 일을 겪기도 했다.

‘검은 머리의 차이콥스키’라 불렸던 작곡가 정추 선생이 장례식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고려인들은 봉분을 만들며 비석을 세우고 주변을 철제 울타리로 마감한다. 사진=김상욱
‘검은 머리의 차이콥스키’라 불렸던 작곡가 정추 선생이 장례식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고려인들은 봉분을 만들며 비석을 세우고 주변을 철제 울타리로 마감한다. 사진=김상욱

김상욱

알마티국립대 조선어과 교수로 카자흐스탄 땅을 밟은 지 29년. 한글 동포신문 주필이고 연합뉴스를 통해 중앙아시아 5개국 뉴스를 전하고 있다. EBS ‘세계테마기행’에 여러 차례 출연했고 KBS ‘1박2일’에서도 고려인 강제이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부부사진전 ‘카자흐스탄’을 열었고, 사진집 <카자흐스탄>과 공저로 두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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